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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처녀 수필집 ‘사장풍년(社長豊年)’ 유감

오재영 기자 입력 2023.07.06 11:12 수정 2023.07.06 16:19

세명칼럼
김시종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나의 첫 시집은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던 그해 9월(1967년 9월), 초가을에 첫 시집 '오뉘'를 2000부나 펴내 이후 5년간은 시집 더미에 깔려 죽을 고생을 했다. 경험도 없고, 경륜도 모자라는 신출내기 시인이 값진 모험으로 무진 고생을 했지만, 미련한 녀석이 되어 81세가 된 지금까지 시집을 겁도 없이 46권이나 펴냈다.
시집과 달리 수필집은 1969년 현대문학 4월호에 첫 수필(처녀작) '메리의 죽음'을 발표하고 나서 꼭 20년이 된 1989년 이른 봄에 '사장풍년'을 대구에 있는 한국출판사에서 펴냈다. 당시 한국출판사 편집국장은 출판의 대가 이선봉 선생이었다. 이선봉 국장님의 후의 덕분에 돈 한푼 안들이고 아담한 수필집을 한 권 갖추게 되었다.
이선봉 국장님은 1942년생으로 나와 같은 뱀띠다. 이선봉 국장은 경상북도 도정월보 편집 책임자로 장기근속하다 명예퇴직을 하셨다고 했다.
퇴직금을 받자마자 점잖은 목사분이 다가와서 성공할 좋은 계책이 있다며 퇴직금으로 기독교명감(목사· 장로 명단집)을 내면, 성공은 따논 당상(堂上)이라며 부추겼다. 처음 만난 목사님을 과신한 이국장은 퇴직금 전액을 전액 기꺼이 투자하여 기독교명감 1만부를 발간하여 대박을 기다렸지만, 목사님의 부추김과는 달리 기독교명감이 단 한권도 팔리지 않았다. 책을 펴내기 전에 명감 신청자를 확보하여 예약금을 받고 안전장치를 해도 안정성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는 터에, 그냥 큰일을 저질렀으니 평생 피땀을 쏟은 퇴직금도 몽땅 날아가고 살기에 조금도 불편이 없던 멋진 아파트마저 팔게 되었다.
일이 이쯤 되자 감언이설로 꾀던 그 목사님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기독교명감 1만부를 파지로 팔았는지 어쩐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이선봉 편집국장은 보통 대범(大凡)한 인사(人士)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를 만든 그 목사 화상을 입에 올려 씹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처녀(첫)수필집 '사장풍년'을 주문하여 500부 이상을 팔아 드렸다. 내가 재직하던 호계중학교 장춘환 교장 선생님은 고맙게 자비로 '사장풍년'을 20부나 구입하셔서 친지에게 몸소 봉투작업을 하시며 보내 드렸다. 장춘환 교장선생님의 경북사대 사회교육과 동기동창으로 포항 영신고등학교 사회교사로 근무하는 외우에게 보내드렸는데, 빠른 시일 안에 만리장서를 보내셨는데, 친구(장춘환 교장)가 보내주신 수필집(사장풍년)이 너무 감명이 깊다고 하셨다. 그때(만 55세)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이 깊은 쾌저(快著)라고 격찬을 하셨다. 장춘환 교장선생님의 친우교사께 졸저를 열독해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첫 수필집이 성공적으로 보급이 되고, 평판이 되게 좋았다. 당시 호계중학교 권재석 교감선생님께서도 수필집 내용이 너무 감명이 깊어(어떤 사제) 영강선생(김시종)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격려하셨다.
첫 수필집 '사장풍년'을 낸 뒤 수필집 4권을 더 내어 나는 지금까지 시집 46권과 수필집 5권을 펴냈다. 내 작품을 낼 때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이선봉 국장님은 저의 38시집 '우는 농'을 엮어 주시고 아깝게도 한 달 뒤에 작고하시고 말았다. 해박한 지식과 소신을 가지시고 필자(김시종)를 밀어 주시던 우의를 길이 잊을 수 없다.
제게 희망과 꿈을 주신 고마운 분들의 후의를 비좁은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고 살렵니다. 다시 한 번 고 이선봉 국장님의 영원한 복락을 비오며, 그 분이 생전에 저의 시집·수필집·백화문학을 저렴한 가격으로 펴내게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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