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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이강년기념관에서 학생들 기념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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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정미의병 시 운강 이강년이 문경으로 진입하기 직전 지나간 소백산 명봉사 일주문 앞. |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유격장으로 임명된 후 잠시 휴식을 취할 사이도 없이 전투에 임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수안보와 문경 전투는 그쪽 지리를 잘 아는 내가 적격자라며 이강년이 자원하여 수안보와 문경 전투에 투입되었다.
수안보에 있는 일본 병참기지와 무기고를 공격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대 임무를 띠고 6초(哨-600명, 1초는 100명)의 의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제천을 떠나 1896년 3월 19일 수안보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일본군의 방비가 예상외로 튼튼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다시 전열을 강화 9초의 병력을 이끌고 문경으로 이동했다.
3월 25일부터 4월 20일까지 문경 조령 지역에 주둔하면서, 먼저 상주 함창 태봉 병참기지를 치기 위해 평천에 주둔하고 있는 서상열 의진을 간접 지원하고, 중군장 윤기영과 함께 조령전투에 임해 일본군 군기고를 공격하여 무기와 탄약, 유황 등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리면서 조령을 완전하게 장악하여 일본군 병력 및 군수품 이동을 차단하였다.
이때 조령에서 멀지 않은 완장리에 집이 있었으나 가지 않았으며, 부인 김 씨로부터 편지가 왔지만 읽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승재가 “어머님 편지인데 한 번 보시지요”했는데도 보지 않고 불태웠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창의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데 집안일에 신경을 쓰거나 사사로이 정에 치우치면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며 장부다운 모습을 보였다.
4월 20일 제천 본진에 복귀하였다. 그 후 5월 23일부터 3일간 제천전투를 시작으로 단양, 원주 등에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의병의 피해가 극심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호좌의진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의암 유인석 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요동에 있는 동포들과 힘을 키워 재기하겠다며 운강도 군사를 해산하고 요동으로 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8월 23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때 운강 이강년의 수하에 남아 있는 의병의 숫자는 1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이강년은 아들 승재와 고향 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왜군과 관군이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다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나 여건이 여의찮아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내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과 싸울 것이오” 하고 그해 7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단양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때를 기다리며 단양 금채동에 은신, 학문에 몰두하면서 다시 재기할 때 전투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며 지냈다. 이때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정미의병 때 실전에 활용하여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 있었다면, 한 말 의병전에는 '속오작대도'가 있었다”라며 그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의병 이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일제가 노골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고,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하고, 행정·사법 사무를 통감부의 감독 아래에 두는 정미칠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자행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구국 항일 무력전이 전개되는 1907∼1910년간에 걸쳐 투쟁하는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시작되었다.
이에 운강 이강년 의병장도 분노하여 1907년 3월 유인석과 제천과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再擧義)하고 5월에 의진을 재편성하여 원주 배양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7월부터 본격 전투에 임해 해산된 군인을 소집하고 원주로 진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다량 확보하여 8월 15일 제천전투에서 민긍호 의진과 연합작전으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월 19일 영월 주천 강가에서 40여 의진이 결집, 이강년은 호서의병대장에 추대되고 난 뒤 8월 23일 충주성을 공격 후 단양과 예천 상리 명봉사를 지나 문경으로 진군하였다. 9월 초 문경 동로 노은3리에 주둔하여 군사를 추가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산북 김용사로 이동 주둔할 때 각 처의 의병장 휘하 1,500명의 의병이 문경으로 집결하였다.
9월 7일 문경읍을 장악하고 신현리 고모산성에 주둔하여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고모산성에는 후군장 신태원을, 이화령은 좌익장 김영식과 참모 이정래를, 하늘재는 좌익장 천보락에게 각각 방어토록 하였으며 9월 9일 조령전투, 9월 10일, 11일 이틀간에 걸쳐 갈평전투, 9월 14일에는 적성전투를 벌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