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마을을 보려면, 그런 곳이 있는 양동마을 등지로 가야한다. 이런 곳이 결정적으로 없어진 때는 소위 새마을사업을 한답시고, 보기엔 우선 말끔한 슬레이트를 입힐 때에, 전통마을은 없어지기 비롯했다. 그러나 새마을사업에서도 살아남은 곳은 지금은 명당으로 있어, 현재는 보존되고 있다. 지역에선 ‘칠곡 매원마을’이다.
‘매원마을’은 칠곡군 왜관읍에서 동쪽으로 4km지점에 있다. 풍수지리상 물형 가운데 ‘매화 낙지형’으로 용두산, 죽곡산, 아망산, 금무산, 산두산, 자고산 등 6개 산이 마을을 매화꽃처럼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칠곡 매원마을 등을 일컬어, 영남 3대 반촌(양반촌)으로 일컬었다. 인조 원년(1623년)에 광주 이 씨 석담 이윤우(李潤雨)가 신동 웃갓(上枝)에서 매원으로 이거 입촌하면서, 집성촌을 이뤘다. 매원마을에는 예로부터 금장지구가 있었다. 서매와 상매에서 해마다 동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마을의 가옥들이 대부분 소실됐다. 현재 고택 60여 채 180여 호가 있다.
지난 15일 칠곡 왜관읍에 소재한 ‘칠곡 매원마을’이 전국에서 마을단위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경북도가 문화재위원회(건축분과 제10차)심의를 거쳤다.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신청한 칠곡 매원마을에 대해 30일간 예고 기간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로 최종 등록했다.
칠곡 매원마을은 17세기 광주 이씨(廣州 李氏)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가 아들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을 데리고 함께 이거(移居)했다. 이도장의 차남 이원록(李元祿, 1629-1688)이 뿌리를 내렸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동족(同族)마을 중 한 곳이다.
마을 배치는 주산이 되는 뒷산의 낮은 산자락을 따라 좌우로 낮고 길게 펼쳐진 형식의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이는 후손들이 중앙부 중매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의 상매와 서매로 분파해 갔다. 마을 영역이 좌우(左右)로 확대되며 나타난 결과다. 이런 변화에 따라 마을 주택은 분파 계보, 입향 순서, 신분 관계에 따라, 대지 위치와 규모 및 형태, 출입 동선에서 뚜렷한 위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상매와 서매 지역의 주택들 역시 규모와 채의 분화 및 구성, 진입 동선, 좌향 등이 서로 다르다. 분파 후손 간, 시기별 주거 형태의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마을 곳곳에는 다양한 민속적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중에서도 ‘소나무 밭’(동솔밭)은 마을 서쪽 경계(풍수지리상 우백호에 해당)의 지형을 보강하기 위한 비보수(裨補樹)다. 풍수 지리적으로 이상적인 주거지(住居地)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동제(洞祭)를 지낸다. 이는 마을의 전통을 계승해오는 등 지난 400여 년간 보존되어온 역사성을 확인해준다.
칠곡 매원마을은 근·현대기를 지나오면서 이뤄진 마을 영역의 확장 및 생활방식 등의 변화 속에서 다른 영남지방의 동족마을과 구별되는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가옥 및 재실, 서당(書堂) 등을 비롯해 마을옛길, 문중(門中) 소유의 문전옥답(門前沃畓), 옛터 등 역사성과 시대성을 갖춘 다양한 민속적 요소들이 포함됐다. 이런 점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서의 등록 가치가 충분했다.
이 매원 마을에 주둔한 미군들이 부대확장을 위해, 포클레인을 들어댔을 때에, 이 마을의 어르신들은 ‘백의(白衣)를 입고 땅 바닥에 들어 누워서’지켜냈다. 어르신들과 백의가 지금까지 마을을 지킨 것이다. 관계당국은 이들 어르신들(또는 후손)를 찾아, 포상하길 강력히 촉구한다.
김상철 경북 문화관광체육국장은 도 지정 문화재의 위상을 높인 쾌거다. 시각을 달리 보면, 지금도 자본에 매몰된 일부 아파트 업자들은 전통마을을 헌다. 자연보존지역에 눈독을 들인다. 이들로부터 골목 마을을 지킬 것도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