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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산성 전투 때 반이 타버린 느티나무= |
구국 민병
충의의 넋이시여
어둠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시여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선 호국의 영령들이시여
선조들이 살아왔고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 이 산하에 흘리신 피
거룩한 희생 앞에 무릎 꿇고
촛불 켜고, 삼가 향불을 사릅니다
-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필자의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 추모 헌시 중에서 -
‘호국보훈의 달’ 6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먼저 가신 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고자 지난 6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아리솔지역아동센터(센터장 오미향)’ 주관으로 학생 26명, 지도 교사, 유관 기관, 향토연구사 등 38명이‘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進軍路) 문경 구간 도보 순례’를 하였다. 이 사업은 지역아동센터와 초등학교, 마을과 유관 기관(문경YMCA)이 연계한 돌봄체계 구축으로 경상북도교육청의 ‘마을 밀착형 지역특화 공모사업’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의병 활동 지역이 산악지대라 위험 구간은 조령산악구조대 10명이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도와주셨고, 차가 다니는 도로 구간은 문경경찰서 관할 지구대 파출소의 경찰차로 에스코트하여 주셨다. 이렇게 장장 41.3km를 도보 순례를 하면서 운강 이강년 의병 대장의 흔적을 찾아 학생들과 함께 창의한 ‘도태장터’와 피 흘려 싸워 승리한 ‘갈평전투’ 등 곳곳의 전투 현장을 찾아갈 때 문화관광해설사, 향토사가들과 함께 필자는 4일간 동행하며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해설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급하면 의병이 활동하여 구국운동을 펼쳤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국가 부흥 운동’에서부터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시대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이곳저곳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임진왜란 때는 고을 수령이나 관리들이 도망갔지만, 오히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백성들이 창의(倡義)하여 저항하였다. 당시 왜군이 조선의 약한 군사력을 파악하고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오산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민초들의 의병 활동으로 곤경에 처했다. 또 일본은 대장이 죽으면 오합지졸이 되고 해산하게 되는데 우리 민족은 대장이 죽으면 또 다른 대장이 뒤를 이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우리 민족만의 특성이 있다. 일본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 위에서 구경하다 전투에서 이기면 세금 내고 복종한다는데, 우리 민족은 신분을 떠나 너도나도 직접 목숨 걸고 싸운다. 때로는 의병이 관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용감하게 싸웠다.
운강 이강년은 1859년 2월 19일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도태마을에서 조선 세 번째 왕인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 19세 손으로 출생하였다. 이강년 어머니께서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출생 시 도태마을 앞 둔덕산이 3번 울었다고 하였다. 이는 비범한 인물이 출생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보았다.
1880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게 참여하였으며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의병장 유인석 등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한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운강 이강년도 선비이고 왕가의 후손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사들을 모집하였고 가은 도태장터에서 거의(擧義)하였다. 처음에는 문중, 포수, 농민 등 60여 명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의병에게 참여하겠다면서 300여 명이 합세하고, 거의 한지 이틀째인 2월 25일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반역 행위자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을 체포하여 구 농암장터 ‘개바위’에서 효수(梟首)하였다. 그랬더니 유생과 농민 등이 찾아와 의병이 되겠다고 하여 600여 명의 의진(義陣)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 2월 26일 상주 함창 태봉과 충북 수안보 병참기지를 연결하는 중요 노선인 고모산성에 부대를 주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함창 태봉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2월 27일 충주의진과 합공작전을 계획했으나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충주의진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모젤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하게 되었다. 이 ‘고모산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의병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구식 화기인 화승총이나 화살로 대응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때 인근 마을과 주막거리가 불탔는데 지금 돌고개 성황당 앞에는 타다 남은 느티나무가 반쪽이 타서 속살을 드러낸 채 서 있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운강 이강년은 ‘고모산성 전투’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3월 12일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고 합진(合陣)한 뒤 유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실천에 옮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하나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 유학자로서 선비들 중심으로 조직된 의진으로 전투력이 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무장 출신 이강년과의 합진은 유인석이 고무(鼓舞)되고 호좌의진을 더욱 튼튼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강년 의병장을 반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