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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송진을 체취하기 위해 만든 V자형 상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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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송진을 체취하기 위해 만든 V자형 상처-2 |
일제강점기 막바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국제정세가 혼란한 시절, 다국적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배를 타고 떠났는데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의 위기에 처했다. 배가 일부 파손되고 물이 차오르는 긴박한 순간에 선장이 결연히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대로 가면 배가 침몰하여 모두가 죽는다. 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세 사람만 내리면 나머지는 살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대로 모두 죽느냐 아니면 세 사람만 죽느냐?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 눈치만 보며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때 홀연히 영국인 한 사람이 일어나 “대영제국 만세!”를 외치고 바다로 몸을 날렸다. 다시 정적이 흐르는데 미국인이 노신사(老紳士)가 일어나 “미합중국(美合衆國) 만세!”를 외치고 풍덩 바다로 몸을 날렸다. 다시 침묵의 시간, 그때 한국인 한 젊은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일본인을 번쩍 들어 바다로 집어 던졌다.
글 서두에 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유머를 썼는가 하면 문경새재에는 ‘아픈 역사의 흔적, 상처 난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과 원한이 컸다.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이 ‘상처 난 소나무’ 앞에 서서 하는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이 역사 이래 우리에게 못 할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일본에는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수급(首級)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코무덤’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나 남원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코무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후에 ‘코무덤(鼻塚)’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지만,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귀무덤에 묻힌 조선인의 피해자 수가 12만 6,000여 명에 이르러고 그 외 지역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18만 명이 넘는 사람의 코와 귀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전과(戰果)를 높이기 위해 군인뿐 아니라 아이, 부녀자 등 민간인까지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의 코까지 베어 보냈다고 하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조선 땅에는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벤 코를 일본에까지 보내는 도중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이나 식초에 담아 갔다고 하니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이 참혹한 일이 두려움이 되어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나 위험에 노출될 때 ‘에비!’‘이비’‘이비야’라고 겁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바로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비야’는 이비(耳鼻)’에 호격조사 ‘-야’가 붙어서 도망가라 피하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하니 얼마나 공포심이 컸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으로 왜군은 10∼40만여 명(일본과 한국, 학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의 조선인을 피로인(被擄人)으로 끌고 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노예로 삼았다. 이때 조선의 도공도 함께 납치해 갔고, 끌려간 조선인 일부는 포르투갈 등 국제 노예시장에, 헐값에 팔려나가는 노예 매매까지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은 귀가 둘이나 코는 하나다. 조선인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라. 병사 한 사람이 한 되의 코를 벤 후에야 조선인을 노예로 삼을 포로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한다.’ 그래서 넘겨준 코 숫자가 적힌 ‘코영수증’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일본 군사들은 혈안이 되어 무참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 동안 숱한 만행이 있었지만, 아시아태평양전쟁 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이 20만여 명에 이르렀고,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이 146만여 명에 달한다니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이렇듯 사람에게 준 피해가 막심하고 가슴 아픈 일인 대다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훼손하고 한민족(韓民族)의 혼이 깃든 소나무에까지 아픔을 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제 수탈 흔적 ‘문경새재 상처 난 소나무’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80여 년의 세월이 흐린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기상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물자인 송탄유(松炭油)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해 소나무에 V자 모양의 상처를 내어 송진을 채취하는 일을 강요했다. 일제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아소 탄광을 운영하며 조선인을 징용하여 강제 노동을 시켜 많은 재산을 모은 일본 아소(麻生) 가문의 ‘아소상점’이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위탁을 받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채취된 송진은 전쟁을 수행하며 전함 등에 방수용 자재로 사용하고, 송진에는 알파피넨 같은 휘발성 물질이 들어 있는데 연료가 바닥이 나자 송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만든 중성유(송유-松油)를 휘발유, 경유에 섞어 자동차나 비행기의 연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진 채취는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를 보면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총 9,539t의 송진을 수탈했다고 하며, 1943년 한 해에만 채취한 송진의 양이 4,074t인데 이는 50년생 소나무 92만 그루에서 채취해야 하는 양이라고 한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은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 전국 분포도’를 제작하고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를 ‘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을 추진, 송진 채취 피해목의 역사적 가치를 기록문화로 남길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상처 난 소나무’ 앞에서 이런 치욕스러운 역사를 반추하며 우리 국민이 가져야 할 교훈은 민족적 수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유비무환의 자세와 부국강병,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명심하되 지난날의 잔인무도하고 부끄럽고 아픈 흔적을 이제는 지우고 대한민국 국격이 높아진 만큼 통 큰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정의롭고 인간다운 멋지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자. 오재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