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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원모정(遠慕亭) 효(孝) 이야기

오재영 기자 입력 2023.03.06 08:56 수정 2023.03.06 12:24

이만유 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원모정 전경, 원모정(遠慕亭) 중수 준공식

효공원
원모정 상량문


갑골문자를 뿌리로 한 한자(漢字) 중에서 ‘孝(효)’ 자를 뜻 풀이하면 노인 노(老)자와 아들 자(子)를 합친 것으로 늙은(노, 耂) 부모를 아들(자 子)이 업고 있는 모양으로 자식이 노인이 된 부모를 잘 봉양한다는 의미다. 조선 시대 통치 이념이고 생활 규범이 되는 성리학에서 충과 효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지니며 효행이야말로 칭송받는 미덕이었다.

경북 문경 산양면 송죽리 덕암마을에는 효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원모정(遠慕亭)이란 정자가 있다. 원모(遠慕)는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 선조를 사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亭子)는 유상지소(遊賞之所)로 자연 속 경치 좋은 곳에 세우는 것이 대다수인데 이 원모정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효의 실천 도장으로서 언제나 충효(忠孝)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원모정(遠慕亭)은 1930년(庚午)에 산양면 송죽2리 덕암마을에 지극(至極)한 효자인 참봉(參奉) 고응두(高應斗-1564∼1627)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300여 년이 지난 뒤 그 후손인 치당공(痴堂公) 고완(高浣) 선생이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지난 2018년 10월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회장 고정환)’이 앞장 서 문중에서 십시일반 모금을 하고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원모정(遠慕亭) 중수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날 권대진 전 문경시노인회장이 원모정에서 나온 상량문을 번역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백행의 근본인 효의 중요함에 대해 설교했다. 그리고 정자 앞에 육각 원두막을 설치하는 등 효를 테마로 한 ‘효공원(孝公園)’을 조성하여 원모정을 찾아오는 이들이 역사를 배우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뒀다.

이 원모정에는 감동적인 효(孝) 이야기가 있다. 1930년(경오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 진성 이씨(眞城李氏) 이기호(李琦浩) 선생이 지은 기문(記文)을 인용해 기술하면, 1592년(선조 25)에 왜적이 침략한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약탈과 살생이 자행되는 전란으로 극심한 혼란과 피해를 볼 때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왜병들이 물 밀듯 들이닥쳤다.

효자 고응두는 팔순의 노부(老父)를 업고 온 힘을 다해 달아나게 되었다. 재앙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하니 아들 등에 업힌 아버지가 이러다 둘 다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한사코 아들의 등에서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심이 남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며 아버지를 꽉 붙잡고 내려놓지 않자 아들의 귀를 깨물었다. 아들의 귀에서 붉은 피가 솟아 옷을 적시고 어깨로 흐르는데도 아들은 태연자약하며 마치 고통을 모르는 듯이 하였다. 더욱 더 아버지를 업은 팔에 힘을 굳게 하면서 오히려 아버지가 혹시 놀랄까 다칠까만 염려하였다.

이와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 그만 추격해 온 왜적들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이제는 죽는구나 했었다. 그러나 이들을 쫓아 오면서 이 상황을 다 본 왜병들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과 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며 살려 주었다. 당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빼앗는 재앙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애와 효성으로 부자(父子)가 서로 그 도리(道理)를 다하는 지극한 정성이 이역 오랑캐 무리에게도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응두는 아버지 사후에도 애통함이 예제(禮制)를 넘었으며, 3년을 시묘(侍墓)살이하고, 선조왕(宣祖王)의 승하 때에는 소복을 3년간 입었다. 이를 전해 들은 경상 관찰사(경상감사)가 그의 효행을 조정에 추천,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명하고, 참봉(參奉)을 증직(贈職)하였다. 

'사람들은 충신(忠臣)을 효자(孝子)에서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 뒤로 이런 사실을 창석 이준(瘡石 李埈)이 상산읍지에 ‘조란실기(遭亂實記)’로 기록했고,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도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남겼다.

그런데 이번 원모정 중수 시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이 공개한 것 중에 주손인 치당공 고완(高浣)이 지은 상량문에 우리나라 연호나 국호를 사용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쓴 것에 대해 모두 주목했다. 이는 가문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보다는 충(忠)을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또 있었다. 1592년 4월 14일에 왜군 제1진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에 침입하여 시작된 7년 전쟁에서 왜군 제2진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 선봉장인 ‘사야가(沙也加)’라는 20대 초반 젊은 장수가 조선을 침략하여 진격하다가 난을 피해 살길을 찾아가는 무리 속에 한 가족을 보았다. 모두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가운데 중년의 사내가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아이들과 함께 허둥지둥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왜군들이 총칼을 휘두르는 급박한 상황에도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가는 모습을 본 왜군 장수 사야가(沙也加)는 순간 일본에선 볼 수 없는 효를 실행하는 그를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왜군의 장수가 되었지만,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소 예의지국 조선을 동경하였는데 자기 목숨이 경각에 처했는데도 노모를 끝까지 모셔 가는 것을 생생하게 목전에서 보게 되니 무엇이 대의(大義)이며 가치 있는 삶인가 고심하며 갈등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사야가는 뜻을 같이하는 부하 수백 명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을 통해 귀순하였다. 곧바로 조선의 장수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누차 큰 공을 세워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 金氏)’라고 부른다. 이 사람이 바로 김충선(金忠善) 장군이고 조선 백성의 효심이 결국 세계사에도 없는 역사를 남기고 기적을 이뤄냈다.

효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하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전설로서 경주시 인왕동 남천에 ‘효불효교(孝不孝橋)’가 있었다. 이 다리의 유래를 보면 신라 시대 때 아들 7형제를 둔 한 과부가 긴긴밤이 외로워 베개를 부둥켜안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봐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을 수없이 보내다가 그만 ​개울 건너 사는 홀아비와 눈이 맞았다. 밤마다 몰래 내를 건너가는 어머니를 본 효심 깊은 아들들이 차가운 냇물을 건너다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아들들은 조선 시대 사회 윤리에 어긋나지만, 어머니도 감정과 애환을 지닌 사람이며 한 여인이라는 갈등 끝에 내린 결정으로 어머니가 밤에 편히 물을 건넬 수 있게 돌다리를 놓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두고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는데 살아 계신 어미에게는 효이지만, 저승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불효인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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