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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관문 주흘관 |
문경을 지켜주는 영산(靈山),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뜻을 지닌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도읍지(都邑地) 또는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으로 나라나 고을의 난리(亂離)를 평정(平定)하거나 나지 못하게 지켜주는 주산(主山)을 말한다. 주흘산 유래중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와 있을 때 이 산에 머물렀다 해서 왕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임금 주(主)자를 붙여 주흘산(主屹山)이라 했다고도 한다.
2002년 UN이 ‘세계 산의 해’지정을 계기로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대한민국의 산의 날’을 10월 18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선정·공표한바 있다.
문경에는 조선 시대 황장목(금강송)을 보호하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인 황장산(黃腸山 1,077m)과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 영봉-1,106m, 주봉-1,076m, 관봉-1,039m), 백두대간의 단전이라는 희양산(曦陽山 998m),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한 듯하다는 대야산(931m) 이렇게 4개의 명산이 있다. ‘백두대간 중심의 고장’ 문경답게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명산을 보유하고 있다.
주흘산이란 이름은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주흘(主屹)’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고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흘산은 현 북쪽에 있고, 나라에서 매년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소사(小祀)를 지낸다고 하였다. 주흘산 소사를 지내는 곳은 문경읍 상리에 있는 ‘상리신당(上里神堂)’이며 신당 안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과 ‘토지지신(土地之神)’ 이란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 나라에서 지내는 제향(祭享-제사의 높임말)은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었는데, 대사는 종묘와 사직에서 지내는 제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사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선농단(先農壇) 제사, 산천·성황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신성한 큰 산과 바다와 강인 악해독(嶽海瀆),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잠신(蠶神)에 제사 지내는 선잠(先蠶),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우사(雩祀) 등에 대한 제사다.
소사는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 농업신(農業神)인 영성(靈星), 얼음을 관장하는 신인 사한(司寒), 말을 지켜주는 신인 마조(馬祖)‧마사(馬社)‧선목(先牧), 말에게 재해(災害)를 끼친다는 귀신(鬼神)인 마보(馬步),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둑에 지내던 제사인 둑제(纛祭) 등이 있었다. 그중 주흘산과 관계되는 제사는 유명한 산과 강에 지내는 명산대천(名山大川) 제사로 전국의 23처에서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초에 정기적으로 지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수시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명산대천제’를 지내는 23처는 1414년(태종 14)에 정해졌는데,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도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豐海道: 현 황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 등이었다. 그중 주흘산(主屹山)산신이 영험해서인지 성종 25년(1494)에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윤(河潤)이 임금의 쾌차를 빌기 위해 이곳에 와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성한 문경의 진산을 두고, 주흘산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역 어르신과 유림에서는 불손하다며 부정하게 말하거나 비하하면 안 된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주흘산은 명산답게 곳곳에 옛길, 여궁폭포, 꽃밭서들 등 명승을 이루고 있고, 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전설을 품고 있다. 주흘산 중턱에 신라 846년(문성왕 8)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한 혜국사가 있고,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 관문을 비롯해 명승 32호 문경새재, 기념물 18호인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 문화재 자료 226호인 조령 산불됴심 표석, 성황당, 산신각, 문경시 보호문화유산인 문경새재아리랑 등 유무형 문화유산이 있으며 고려 왕과 관련된 대궐터,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전국의 모든 산이 임금이 있는 한양 쪽을 향하고 있는데 유독 문경 주흘산만이 돌아앉았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돌아앉게 된 이유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전국의 산들이 새 도읍지의 주산이 되기를 바랐는데 소식을 늦게 들은 주흘산이 급히 달려가다가 문경에서 고개를 쭉 빼 들고 북쪽을 바라보니 이미 삼각산(북한산)이 떡하니 주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라 그만 낙심하여 삼각산 보기 싫다며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의 전설은, 주흘산이 비록 도읍지 주산은 되지 못했지만, 천연요새를 만들어 내가 여기서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에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조총으로 무장한 1만 8,700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침입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이를 막지 못했다. 이는 왜군이 두려워한 요새를 군사전략으로 이용하지 못한 사람 탓이지 주흘산 잘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