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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순연 편백숲하우스범어점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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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쓰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글은 어떤지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적어도 내 글이 다른 글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는 걱정과 함께 독자들의 눈높이와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조심스러움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근에 어느 일간지에 실린 '공칠과삼(功七過三)'이 눈에 들어왔다.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는 말이니, 곧 공로가 7할이고 과오가 3할이라는 뜻이리라. 운이 7할이고 재주가 3할이라는 뜻의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여, 사람의 일은 그가 가진 재주보다 운이 많이 좌우한다고 하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공칠과삼’은 언뜻 와 닿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국의 등소평이 전 정권의 모택동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 정권을 잡고 나서 모택동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공칠과삼'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를 힘들게 한 다른 사람은 깎아내리고, 자신이 한 일의 공은 부풀리기 일쑤다. 그런데 자신에게 가장 큰 시련을 안긴 사람의 공을 과보다 2배 넘게 평가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자신에게 정치적 피해를 준 상대지만, 그 공(功)만큼은 인정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좋은 일화로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과(過)는 넓은 의미의 실수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필자도 살면서 과(過)를 많이 했다. 그 실수는 처음부터 예상하지 않았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연히 용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수는 살아가면서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혹시 실수를 하게 될까 두려워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실수가 어떤 경우에나 용납되는 것도 아닌 것은 실수가 불러오는 피해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는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사람마다 제각각 가능한 한 피하려 노력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실수라면, 과감히 그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하고, 실수를 인정한 당사자에 대해서는 실수 뒤에 숨어있는 공로조차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필자에게 그런 실수를 구분하라 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싶다. ‘해도 되는 실수’와 ‘하면 안 되는 실수’다. 실수를 해도 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표현이지만, 지나간 상황이 단순 과오였고 그것이 용서될 수 있는 수준이며, 경우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때 ‘해도 되는 실수’라고 이름 짓고 싶다. 이는 단순한 실수를 넘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이 가능하고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바로 ‘해도 되는 실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서는 안 되는 실수’다. 그 자체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고 회복 불가능한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정의하고 싶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런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악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피해가 발생하여 혼란이 더해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그런 실수는 용서될 수 없으므로 ‘해서는 안 되는 실수’라고 명명하고 싶은 것이다.
뉴스에 소개된 세계적 인물들의 실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관심을 받는다. 누구에게나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실수가 남다른 주목을 받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 실수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사례에서 세상이 실수에 너무 각박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해서는 안 되는 실수’에 대한 대가는 냉혹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어쨌든 실수를 피할 수가 없다면 줄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의 주장은 이렇다. 우선 자기감정을 지나치게 개입시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자신에게 충고하는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을 해주거나 자신을 칭찬만 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듣고 싶어 하지도 않아 생기는 현상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실수할지 모를 자신을 도와줄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필자는 한자의 짜임새는 잘 모르지만, ‘공칠과삼’을 응용하여, 우리는 특히 공영과십(功零過十)에 사로잡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공로는 영(0)으로 하고 그 사람의 실수를 십(10)으로 평가하는 일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인정하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돋보인다.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나 그렇다고 그런 실수에 당당하지 않아야겠다. 후일 필자의 칼럼이, 필자를 아껴주시는 우리 회원님들이나 지인들에게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극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공삼과칠(功三過七)’이라는 과분한 평가라도 받기 위해 좋은 글을 쓰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