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본주의와 학력주의
한국 자본주의는 다른 나라 자본주의와의 어떤 점이 다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온 제도와 문화 즉 역사가 다르다.
한국자본 주의의 발전요인을 꼽을 때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과 높은 교육열은 그에 대한 설명을 따라 다닌다.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있었지만, 해방 이후 위든 아래든 주체적으로 집단적 대안을 만드는데 실패하면서 한국인은 더욱 가족 단위로 한 지위의 유지나 상승을 꾀하고 주된 수단은 학력이었다. 따라서 한국 자본주의사에서 주체의 형성에 자연히 가족과 학력주의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학력주의는 언제 제도로 정착되었을까? 학력주의는 학력의 진학과 취직을 위한 자격증 역할을 할 때 본격적으로 작동되며 따라서 학교제도 및 기업의 인사제도와 긴밀히 결합된다.
삼일운동 이후 한국인이 보인 교육열은 당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23년 처음으로 공립보통학교 보통과 학생수 29만 3318명이고 서당 학생수는 25만 6851명이었다. 이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공립보통학교를 일본이 펼친 동화정첵의 주요 시설로 보고 서당을 그에 대한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당혹스런 장면이다.
더욱이 일본의 통치에 거족적으로 저항했다는 삼일운동 직후가 아닌가. 이런 교육열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교육기회 확대를 추진한 문화통치의 성과로 선전했고 민족주의 세력은 실력양성운동의 확산으로 파악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삼일운동을 기점으로 식민지 교육기관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이 기피에서 수용으로 전환되었다. 한우회는 그 요인으로 실력양성론의 확대 전파 학교의 선발 배치 기능과 지위획득 욕구 학교교육을 통해 관리가 되려는 전통적 교육관이 심어졌다.
한국인 주체를 분석한 연구가 조선총독부의 그 정책을 배경으로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책의 내적논리와 일본의 내적 배경을 분석한 결과 삼일운동 등 한국인의 저항과 요구를 정책의 전제로서만 언급한 경향이 많다.
◇삼일운동정신과 교육 요구의 충위
갈등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삼일운동 이후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요구사항을 알아보면 삼일운동은 일본이 지난 식민 지배에 대한 총평가로 조선인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1919년 6월 조선총독부의 경무부장 회의에서 헌병대장이 보고한 소요사건 상황에는 조선인의 불평과 희망이 전국적으로 조사되어 있다. 대립되는 것이 잘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가장 많은 내용은 교육제도와 시설개선 요구이다. 크게 세 가지로 추려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 둘째는 교육기관의 증설, 셋째는 교육내용의 개선이다.
이를테면 증설을 바라는 교육기관은 일본인 학교와 동등하게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학교교육이다. 교육내용은 실업 위주가 아니라 일본인과 같은 정도의 문명교육을 바랐다. 삼일운동 직후 조선헌병대사령부의 조사에 나타난 조선인의 교육에 관한 요구는 두 가지 흥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민족교육으로 교육목표나 이념과 관련이었다. 다른 하나는 제도와 시설개선으로 교육기능과 관련이 있다. 불평과 희망의 내용은 후자에 치우쳤다. 이는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는 관리나 유식자의 의견이 많이 반영이 되었다.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를 체제 내의 제도와 시설개선으로 순차적으로 탈민족을 시키려는 전략이 비밀리에 숨어 있었다.
◇학력주의의 제도화와 기업
조선 사람의 가슴에 교육, 신교육에 대한 갈망을 넣어준 것은 현 세기 초엽에 바야흐로 눈을 뜨기 시작한 내셜리즘이다. 교육은 그들이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학력주의는 학력의 진학과 취직을 위한 자격 역할을 할 때 본격적으로 작동되며 따라서 학교제도와 결합이 필요하다. 1894년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화교육체제가 수립됨에 따라서 교원, 법관, 관료 등 공공부문을 필두로 학력이 자격으로 요구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05년 이후 더욱 확산 되었고 1910년 강점 이후 표준학력은 일본의 학제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교육의 간이실용을 표방한 결과 식민지 조선의 학제는 일본의 것과 분절 되었다. 조선인이 중등학교를 나와도 수업기간이 짧아 진학이나 취직의 자격요건으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 삼일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요구로 수용하여 학교수업 연한을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학제를 동등하게 하고 상호 연결시켰다. 따라서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학력주의가 제도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학력이 진학과 연결됨에 따라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 조선중, 상층의 학생들은 진학의 길로 나아가고 그 결과 일부는 만인이 선망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학력주의의 빛과 그림자
삼일운동 이후 조선인의 교육요구는 민족성을 존중하는 민족교육과 제도, 시설의 개선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나타난다. 근대학교체제에 적용한 중, 상류층은 후자에 치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교육을 목표로 제도적 평등을 추진하는 내지연장주의에 따라 일본과 동일한 제도를 표방하는 교육정책을 폈다.
민족교육과 식민지교육이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목표 이념인 제도나 시설 같은 기능적 측면은 서로 수용될 여지가 컸다. 이러한 조선인의 요구와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갖는 공통분모를 토양으로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학력이 진학과 취직의 자격이 될 수 있도록 학제가 구비되었다. 나아가 기업은 학력을 인사제도에 적극활용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학력주의의 제도화가 되었다.
최근 학력주의는 한국 근대화 또는 한국 자본주의의 형상의 주체적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해방 이후 식민사학 극복을 위해 제기되었던 내재적 발전론 중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차원의 능력론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발전의 내적 조건과 적응력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과 그 근원으로서 조선 후기 이래 자기 개발과 교육의 증식을 추구하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