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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 기도굴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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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중 1위로 선정된 문경새재에는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도들이 모여 기도했던 기도굴이 있다. 이 굴은 문경새재 1관문과 2관문 사이 교귀정 위쪽 옛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을 오르면 길이 7m, 폭 5.5m, 높이 1m 크기의 자연 동굴로 우리나라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세례명:토마스)신부가 경상도와 충청도에 전교 활동을 하면서 자주 지나다녔던 길 옆의 신도들 비밀 예배소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당시 모셨던 십자가와 성모상 등이 남아 있다.
최양업 신부는 1년에 7000여 리를 짚신을 신고 전국을 걸어서 밤낮 없는 선교활동을 하다가 쇠약해진 몸에 병과 과로가 겹쳐 안타깝게도 문경새재 입구인 문경읍 진안리에서 선종(善終)했다.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2002년 9월 29일 주막터 토지를 매입, 가톨릭 ‘문경 진안리성지’로 지정하였다.
선종(善終)이란 용어는 “착하게 살다 복되고 거룩하게 삶을 마쳤다”는 뜻인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 서구의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직자의 죽음에 대한 표현인 라틴어 “mors bona, mors sancta”을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인데, 莊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교 한문 교리서에도 기록돼 있고 한국 천주교 초기부터 써온 용어다. 김수환 추기경이 별세 했을 때도 선종 했다고 하였다.
사람이 생을 마감하고 죽게 되면 종교나 신분에 따라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가 다르다. 천주교는 선종했다고 하고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는 뜻의 소천(召天)했다고 하고, 불가에서는 사바세계인 이승에서 번뇌 없는 곳으로 갔다는 의미로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하거나 입적(入寂) 또는 입멸(入滅)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붕어(崩御), 왕은 승하(昇遐), 국가 원수 및 성인은 서거(逝去), 일반인들은 사망(死亡), 별세(別世), 운명(殞命), 영면(永眠), 작고(作故), 타계(他界) 등으로 표현하나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사람이 죽을 때 오복(五福)의 마지막이 되는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할 수 있다면 누구나 더 바랄 나위 없는 선종이 될 것이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국경 감시가 심하고 천주교 박해가 심한 조선에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1835년 말에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모방 신부는 입국 후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836년에 15세의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이어서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김대건(안드레아)이 합류하여 모방 신부 댁에서 함께 생활하며 라틴어와 교리(敎理)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최양업은 1836년부터 1842년까지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사이 1837년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 이후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 받았고,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함께 선교사업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최양업은 1844년 12월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는 비통한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하루빨리 귀국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을 하면서 극동 대표부가 있던 홍콩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서가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주교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김대건 신부를 이어 두 번째 사제품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 시도 끝에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즉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000여 리를 걸어 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충북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859년(철종 10) 말에서 1860년(철종 11) 8월에 걸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인 경신박해(庚申迫害)를 포함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이후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활동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진안리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로서의 활동을 멈추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최양업 신부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엄숙하게 장례가 치러졌고 그 시신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인 충북 제천의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천주교 신부를 백성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목탁과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탁덕(鐸德)’이라 불렀다. 후세인들은 이렇듯 존경받는 역사 인물 김대건 신부에게는 새남터에서 효수형(梟首刑)으로 참수되었기에 ‘피의 순교자’라고 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2여년 간 조선 팔도 가운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등 127개 교우촌을 찾아 사목하면서 해마다 7000여 리를 걸으며 목숨을 건 선교활동 중 과로사 하였기에 ‘땀의 순교자’, ‘길 위의 목자’라고 한다.
이 외에도 문경에는 거룩한 종교적 활동은 물론이고, 선진 학문과 사상에 먼저 눈떠 민중의 삶을 바꾸려고 한 개혁운동가이며 인간이 인간다운 삶과 귀천이 없는 평등사회를 구현하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하다 순교한 사람들의 행적이 남아 있는 천주교 성지가 다수 있다.
대표적으로 진안리성지를 비롯해 여우목성지(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와 마원성지(박상근 마티아)가 있고 그 외 한실 교우촌, 먹뱅이 교우촌, 은재 돌마래미 교우촌 등이 있다.
2021년 지난해가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천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성인(聖人) 이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하기 위한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양업 신부를 시복(諡福)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붙이는 존칭인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였고 두 번째 기적 심사를 진행 중이다.
복자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순교하거나 2번 이상의 기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모쪼록 하루빨리 복자(福者)로 선포되길 바라며 ‘길의 고장, 문경’에서 최양업 신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길 위의 천국, 문경’이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