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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모자실기시합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11.22 17:00 수정 2016.11.22 17:00

서예가 한석봉(1543~1606)과 서예가 김정희(1786~1856)는 조선시대의 서예계의 쌍벽이요, 양대산맥이다. 한석봉은 본명이 한호, 조실부친(早失父親)하여, 홀어머니가 떡장사를 하여, 외아들 뒷바라지를 하였다. 소년 한석봉은 절간에 가서, 한학과 서예를 닦았다. 어느 정도 학업 성취에 자신이 생기자 서둘러 하산(下山)했다. 오랜만에 아들이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다. 공부를 하다 중도에 그친 것은 베를 짜다, 한필을 못 짜고 자투리를 만든것과 같다며, 어머니가 석봉에게 제의를 했다. 호롱불을 끄고, 어머니는 떡을 빚고, 석봉은 붓글씨를 쓰기로 했다. 다시 불을 켰을 때, 어머니가 썰은 떡은 자로 잰 듯 고르고 일정했고, 석봉의 글씨는 삐뚤삐뚤했다. 그날밤 석봉은 곧바로 절간 공부방을 찾아 떠났다. 석봉은 1567년(24세)에 소과(진사시)에 급제했고, 궁중의 사자관(기록원)으로 장기근속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가평군수(종4품)로 특별채용됐다. 한석봉은 서예에 정진(精進)하여, 왕희지체(진체)안진경필법에 정통하였으며, 해서·행서·초서등 모든 서체에 두루 통달한 대방(大方)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군이 조선에 와서 한석봉 서예작품을 보고, 조선에 중국보다 왕희지글씨가 많다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고, 소갈머리없는 당시 조선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하는데, 명나라 군사들의 한석봉을 향한 찬사가 나에겐 비아냥으로 들린다. 조선사람들은 조선인답게 조선글씨체를 써야지, 왜 왕희지체를 무조건 모방하는 것이냐! 하는 칭찬 아닌 질책같다. 한석봉은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존중하는 선비의 어원(語原)은 명확하지 못하고, ‘선배’란 말이 변하여, 선비가 되었는다 하는데, 확실한 느낌이 오지 않는다. 문헌상 선비가 처음 쓰인 것은, 16세기에 발간된 ‘한석봉천자문’책에 ‘선비 사(士)’가 나온다. 선비란 말을 처음 기록에 남겼으니, 한석봉선생과 한석봉천자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선비 사(士)’짜를 풀어보면, ‘+’과‘-’로 되었다. 선비란 모름지기 자기 생각이 열(+)가지 헷갈려도, 하나(-)로 조절할 줄 아는 자기통제능력이 있는 수양된 사람이기에, 옛날부터 선비를 소중하게 예우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석봉선생은 글씨는 깔끔하게 잘 써셨지만, 남긴 시조 한편을 보면, 성격이 밝고 소탈하신 분같다. 한석봉선생의 시조는 ‘청구영언’(김천택)에 한수(首)만 실려 있지만, 시적(詩的)완성도와 풍류(風流)는 일당천(一當千)이란 생각이 든다. 한석봉서백(書伯)의 시조속으로 들어가 볼까나. 솔불혀(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돌아온다 /집 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아해(아이)야 박주(막걸리) 산챌(산나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소탈한 자연주의자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떠오른다. 한석봉선생의 옛 시조가 현대시조보다도 자연스럽고 정서가 풍부하다. 서예의 천재가, 시문(時文)에도 못 말릴 대가(大家)시다. 나도 홀어머니사랑을 받고,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했기에, 한석봉선생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존경스러운지 모르겠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선생은 조선전기 한석봉선생과 더불어 조선 서예의 쌍벽이라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조선특유의 추사체를 계발한 독창성이 강한 매우 소중한 서예가다. 추사 김정희는 글씨 추사체 말고도, 묵화에도 대성한 천재예술가다. 아호가 추사, 완당을 비홋한 4백여개나 되며, 금석학에도 대가(大家)로서, ‘금석과안록’을 지었고, 북한산비등 신라 진흥왕의 4대 순수비를 처음 발견 고증했다. 추사는 다섯 살 때 입춘서를 대문에 붙여, 당시 채제공승에게 격찬을 받았고, 채정승이 김정희의 대성(大成)을 예언했을 정도다, 추사는 자신이 계발한 추사체뿐 아니라, 예서·행서에도 특출했다. 김정희는 33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아버지 김노경도 대감(판서)를 지낸 명문(名門)중 명문이었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세한도’같은 특출한 작품을 남겨, 국보로 지정되어 그림이 기립을 받고 있다.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지까지 위문차 방문한 애제자 이상적 역관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한석봉(전기)과 김정희(후기)는 쌍벽으로, 끼친 주요작품은, 한석봉은 ‘한석봉천자문’ ‘서경덕신도비’ ‘행주승전비’등이 있고, 추사 김정희는 ‘금석과안록’고증한 북한산비(국립박물관 소장)와 추사체의 서예 작품과 ‘세한도’가 빛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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