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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오늘까지 이어지는 퇴계의 정신, 陶山書院

조덕수 기자 기자 입력 2019.04.24 20:59 수정 2019.04.24 20:59

 

▲ 추로지향(鄒魯之鄕) 기념비
鄒魯之鄕의 의미
첫째, 도산서원 ‘鄒魯之鄕’ 기념비에 대해 한학자이신 연민 이가원(1917~2000)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전서(篆書) 추로지향과 가는 해서(楷書)는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원장 재임시에 쓴 것이다. 예로부터 예안과 안동을 추로지향이라 일컫은 것은 멀리 중국의 공자와 맹자가 살고 있던 노(魯)와 추(鄒) 두 나라에 비한 것이며, 이 말은 성인이 살고 있던 고장이라는 뜻이다.
둘째, 삼성문화사의 국어대사전에서는 ‘鄒魯之鄕’을 ‘공맹(孔孟)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일컫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셋째, 맹자의 고국에 관해서 사마천의 史記와 孟子章句에서 ‘맹자는 鄒나라 사람이다’고 기록해 두고 있다.

▲ 석간대(石澗臺)
퇴계 선생 62세(1562) 때 제자 이귀암(李龜巖:禎)이 예안에서 며칠 머물다가 떠날 적에 송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퇴계 선생이 당시(唐詩) 한 수를 읊어 보내셨기에 지금도 바위에 그 시가 새겨져 있다.
1976년 안동댐을 조성할 때 원래의 석간대가 수몰지구에 위치하고 있어 비문으로부터 탁본을 한 후 원래 석간대에서 위쪽 10m 지점의 바위에 각인하여 석간대라 부르고 있다.

▲ 탁영담(濯纓潭)
추로지향기념비를 지나 오른쪽에 내려다 보이는 강을 이른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강물이 맑고 깊은 담을 이루어 흘러넘쳐 흐르는 형상이다. 이름은 굴원의 시에서 취했다. 탁영담 중간(도산서원에서 동쪽=왼쪽)에 넓고 편편한 바위는 반타석이라 불렀다.
‘탁영’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에 전하는 일화에서 나오는 말이다.

▲ 부용봉(형제봉)
부용봉은 마치 연못 속에서 잔잔히 물결치는 듯이 흐르는 온화한 취병산(翠屛山)이 수파를 이룬 골을 넘어 금새라도 터질 듯 한 한 송이의 연꽃 망울처럼 생긴 산이다. 또한 사이좋은 두 형제가 나란히 산을 넘고 있는 모습이라는 뜻에서 형제봉이라고도 부른다. 아마도 퇴계 선생은 류운용, 류성용 형제거나, 김부의, 김부필 형제가 다래(月川) 고개를 넘어오는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부용봉을 중심으로 좌측(동쪽)으로 내달리는 산을 동취병(東翠屛), 우측(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을 서취병(西翠屛)이라 하고, 모두 합쳐 취병산(翠屛山)이라 불렀다.

▲ 시사단(試士壇)
강 건너편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별과를 보였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조대왕이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을 추모해 그 16년(1792)에 관원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로 과거를 보였는데, 응시자는 7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현위치에서 지상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의 자리를 표해 두고 있다.

▲ 곡구암(谷口巖)
도산서당을 들어서는 첫 번째 산문이라 표현하고 있다.
성지순례를 하던 옛 사람의 기록에는 강 언덕을 올라서면 곡구암에는 양쪽으로 산문을 연상케 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이곳을 통과하면 도산서당의 문인 유정문을 지나야 비로소 도산서당에 이르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연대(天淵臺)와 운영대(雲影臺)
퇴계 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天淵臺), 서쪽을 운영대(雲影臺)라 불렀다. 수려한 주변의 산세와 맑은 강물이 머물다 흘러가는 탁영담(濯纓潭)의 운치를 즐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천연대’라는 이름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날짐승은 하늘을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는 글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는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돌고 돈다(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라는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탁영담’의 한가운데에 있는 넓고 비스듬한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이라 부른다.

▲ 열정(冽井)
석정감열(石井甘冽), 즉 돌로 된 샘물의 물이 맑고 맛이 좋아 선생께서 식수로 사용하셨던 우물이다.
마음을 정화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세심장(洗心場)이라고도 한다.

▲ 역락서재(亦樂西齋)
이름에서 뜻하는 그대로 퇴계 선생은 서재로 활용했다. 마루칸은 퇴계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면서 귀중한 많은 전적을 보관했고, 이곳에 주로 거처하였던 제자 정지헌은 그만큼 많은 책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제자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이 거처할 곳을 짓겠다고 했을 때 퇴계 선생은 ‘내가 지어주마. 좀 기다려라’고 제자들이 건축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선생은 재력이 넉넉지 못해 건축을 자꾸만 미루게 되자 제자들이 몇 번의 서신을 보내면서 자신들이 건축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자 끝내 마지못한 선생은 마침내 초가로 단촐하게 지을 것을 부탁했다.
‘역락’은 논어 학이편의 ‘유붕자원방래 불역열호’에서 취했다.

▲ 농운정사(?雲精舍)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퇴계 선생이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漢字)의 ‘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했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했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했다.
첫 번째 특징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일한 ‘工’자 모양의 기와집으로 건축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건물이다.
두 번째 특징은 4칸의 벽마다 설치 된 문의 모양이 전부 다르다는 점이다.
농운(?雲)의 의미는 도홍경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청빈하게 살아온 노학자가 농산 기슭에 은거해 살고 있을 때 절친한 친구가 찾아왔으나, 대접할 것이 변변찮았지만 평소 자신이 먹던 그대로 밥상을 차려 내고는 농산의 정상에 굽이굽이 걸린 백운을 감상하며, 숟가락을 들기를 권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정사(精舍)라는 단어는 인도에서 스님들이 불경을 연구하던 집을 말하던 것이다. 학문연구와 심신수양도 스님들처럼 도를 깨우치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라는 교훈이다.

▲ 금송(錦松)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식수이다. 원산지는 일본. 수목명 코야마키(高野松)다. 삼나무과로 기념식수종 세계 1위를 자랑한다.
 
▲ 몽천(蒙泉)
도산서당 앞의 샘이다.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 강명한 스승이 어리고 몽매한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물 한 잔씩 경인(敬仁)으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다.

▲ 도산서당(陶山書堂)
설계-퇴계 이황,  감독-이문량,  시공-법연, 정일
청량산이 강학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퇴계 선생은 토계를 따라 양진암, 지산와사, 한서암을 거쳐 도산서당을 1557년 최종 강학처로 자리잡게 이른다. 퇴계 선생의 기록에는 제자들과 함께 처음 이 자리를 찾았을 때 농삿일을 하던 부부로부터 구입했다고 적어 두고 있다.

▲ 매화원(梅花園)
도산서당 옆 표석은 퇴계 선생의 매화시첩에서 집자하여 새겼다.
매화는 다섯 장의 순결한 백색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은은한 향기를 지녔다. 사군자(四君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에서 매화는 으뜸으로 아치고절(雅致高節, 우아한 풍치와 고상한 절개), 혹은 빙자옥질(氷姿玉質, 자태는 얼음처럼 차갑고 옥처럼 맑다)이라 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봄을 기다렸다. 구구(九九)는 동지로부터 날짜를 계산하여 81일간을 가르킨다. 81개의 매화꽃 형체를 그려 두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색을 칠해서 81일째가 돼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으로 이때가 대충 3월12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 충실, 인내, 청심’등으로 좋은 의미들만으로 넘쳐 나지만 ‘미덕(美德)’이라는 말로 총칭할 수 있다.

▲ 정우당(淨友塘)
퇴계 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했다. 연꽃을 조그만 도산서당 앞마당에까지 들여다 놓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로 소중한 벗으로 삼았는지 짐작해 봄직도 하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욕심을 채우지 않아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 절우사
도산서당 동쪽 산 아래에 매화나무,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심어 절우사라 했다.

▲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을 뒤로 하고 매화원을 거쳐 계단을 오르면 도산서원 내삼문인 진도문(進道門)이 있다. 진도문 현판을 보고 있노라면 무한의 우주를 향해 도학(道學)을 싣고 유유자적하게 나아가는 진도(進道)의 배를 연상케 한다. 진도(進道)는 ‘도학을 밝히는 것을 마치 우매하게 하고, 도학에 나아가서는 물러서지 말라(明道若昧 進道若退)’는 뜻으로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찬한 근사록(近思錄)에서 인용한 것이다.

▲ 광명실(光明室)
진도문의 좌우에 서고로 사용하는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광명은 ‘수많은 서적이 나에게 광명을 안겨 준다(萬卷書籍 惠我光明)’라는 뜻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이곳에는 임금의 내사본(內賜本)과 퇴계 선생의 수택본(手澤本)을 합쳐 5천여 권의 전적을 보관해 오다가 2003년도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했다.

▲ 동?서재(東?西齋)
진도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유생들의 기숙사라 할 수 있는 동?서재가 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로 박약의 의미는 논어 옹야편(雍也篇)에서 ‘군자가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묶어 실천한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이다.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로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선비는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배움에 임한 자의 마음가짐으로 더할 나위없는 글귀다.

▲ 전교당(典敎堂)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이 게시돼 있는 보물 210호 전교당(典敎堂)을 살펴보기로 하자. 도산서원 현판은 조선 최고의 명필인 한석봉(韓石峯)이 선조 앞에서 직접 쓴 글로 천하 명필도 퇴계 선생의 유적지에 대해 필적을 남기는 일에 못내 부담이 됐던지 산(山)자와 도(陶)자에는 긴장한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유생들의 강학 장소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서원 원장의 집무실인 한존재(閑存齋)가 부설돼 있다. 한존은 주역(周易)의 ‘사악함을 막고 성실을 보존한다(閑邪存其誠)’라는 뜻으로, 지체 높은 자의 마음 자세로 덕망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강당 벽체에는 보고(視), 듣고(聽), 말하고(言),행동(動)할 때 경계해야 할 4가지를 게시한 ‘사물잠(四物箴)’, 하루를 근면성실하게 생활할 것을 이르는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유교의 기본질서를 나타낸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왕족이 돌아가신 날을 기록한‘국기안(國忌案)’, 서원 유생의 학칙인 ‘원규(院規)’, 향사 때 역할을 분담한 ‘집사헌관분정초(執事獻官分定抄)’, 정조 임금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명하는 ‘교근서(敎謹書)’와 퇴계 선생에게 올리는 ‘치제문(致祭文)’ 등이 게시돼 있다.
또한, 숙종조에 이르러 서원의 폐단이 날로 심각해지자 서원을 정리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을 때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8개 학문연구의 중심적 서원은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숙종의 지시 현판이 게시돼 있다.

▲ 장판각(藏板閣)
전교당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서원의 인쇄소로 장판각(藏板閣)이 나온다. 이곳에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선조어필(宣祖御筆) 등 2,970장의 목판을 보관해 오다가 2003년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했다. 일반서원에서 장판각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사액서원(賜額書院)에 한해서 정부에서는 학문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판각에 필요한 경비와 관련전문가를 지원하기도 했다. 목판으로 사용되는 나무는 주로 오리나무, 후박나무, 벚나무 등 나뭇결이 연한 것을 사용했다.

▲ 전사청(典祀廳)
장판각을 나와 위로 올라가면 보물 제211호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이곳에는 퇴계 선생과 제자 조월천(趙月川)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2?8월 중정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부속건물인 전사청(典祀廳)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 두던 곳으로 주고(酒庫)와 제수청(祭需廳)이 있다. 주고 마루 아래가 깊게 파여진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서원의 서책을 감췄던 흔적으로 동광명실에 게시돼 있는 이주보공공적 현판에 잘 나타나 있다.

▲ 상고직사(上庫直舍)
하인들이 거처하던 살림집으로 일반민가의 안채 형식으로 건립됐다.
거처하던 방은 모두 5개가 있고 한 방에 한 가족씩 머물도록 배려했다. 집의 형태는 ‘口’자로 어린아이를 포함해 30여명 정도가 생활하면서 발생시키는 생활소음을 차단하고, 여름과 겨울에도 그늘진 곳과 햇볕이 잘 드는 곳이 공존하게 돼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
조덕수 기자 duksoo11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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