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앞둔 영국에서 지금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그래머 스쿨’이다. 그래머 스쿨은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입학 시험을 치르게 해 성적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중등학교를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명문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그래머 스쿨이 갑자기 브렉시트 이슈 만큼이나 논란이 된 것은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취임한 뒤 지난 9월 ‘그래머 스쿨 확대’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앞서 노동당 정부 때 이뤄진 교육평준화를 깨뜨리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메이의 새 정책은 지난 1998년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특권층 학교 반대”라는 취지로 채택한 그래머 스쿨 확대 금지 정책을 뒤집는 것이다. ‘그래머 스쿨 확대’는 영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쟁 대상이 되어온 사안으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메이 총리의 전임자였던 부유한 중산층 엘리트 출신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재임 당시 켄트 지역에 소재한 한 그래머 스쿨의 분교 설립을 허가하긴 했으나,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케케묵은 그래머 스쿨 이슈를 메이가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브렉시트 이후 국가 경쟁력 하락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계층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능력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메이는 “나는 영국이 세계에서 위대한 ‘실력자층’(meritocracy)이 되길 바란다”고 포부를 밝혔다.◆메이도 ‘그래머 스쿨’ 출신= 메이 총리가 이 같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는 본인이 그래머 스쿨 출신이란 점과도 무관치 않다. 성공회 목사의 딸로 태어난 메이는 그다지 부유하진 않았던 가정형편 때문에 공립학교를 다녔으나, 공부를 잘해 그래머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다. 데이비드 캐머런과 해럴드 맥밀런, 앤서니 이든 등 상당수 남성 총리들이 이튼스쿨과 같은 사립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것과는 사뭇 다른 코스다.메이 총리는 지난 7월 취임사 뿐 아니라 지난 달 그래머 스쿨 확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보통의 노동자 계층’(ordinary working-class)을 여러번 언급했다. 그는 “앞으로는 모든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며 “영국의 미래 교육 시스템은 일반적인 노동자 가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래머 스쿨은 공립 중등학교 전체 3000여개 가운데 영국 잉글랜드에 163개가 있고, 아일랜드 북부에 69개가 있다.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도 그래머 스쿨이란 이름의 학교들이 있기는 하지만 공립 그래머 스쿨은 하나도 없다. 영국에서 보편적인 학교는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로 이곳에서 학생들은 능력과 적성에 상관없이 함께 교육을 받는다.그래머 스쿨은 16세기부터 생겼으나, 현대적인 개념의 그래머 스쿨은 1944년 교육법(Education Act)에 근거해 설립됐다. 이에 영국 중등학교는 크게 2가지로 나뉘게 된다.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과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던스쿨(modern school)이다. 전자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문적 공부에 집중하는 곳이고, 후자는 상업 활동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곳이다. 기술학교(technical school)도 있으나 그 수는 매우 적다.1950~1960년대에 주로 노동당 정치인들과 교육평등주의 학자들은 선별적 교육시스템이 계급 구분과 중산층 특권을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1965년 영국 정부는 지역 교육 당국이 단계적으로 그래머 스쿨과 모던 스쿨을 폐지하고 ‘종합학교’로 바꾸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1300개까지 늘어났던 그래머 스쿨이 1970~1980년대 크게 줄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가 노동당 집권 지역에서 이뤄졌으며, 보수당이 강세인 지역은 그래머 스쿨을 천천히 폐지하거나 전혀 폐지하지 않았다.◆그래머 스쿨, 왜 늘이려 할까=교육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노동당 정부는 1940년대에 정권을 잡고, 11세 어린 나이에 ‘일레븐 플러스’(11+) 시험을 보아 장래를 선택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평준화 정책을 도입·시행했다. 캐머런 보수당 정부에서도 이 같은 기조는 유지됐다.이후 취임한 메이 총리는 첫 주요 개혁 과제로 중등학교(우리의 중·고교) 평준화 탈피와 선발 입학제 확대를 내걸었다. 그는 또 그래머 스쿨이 부유층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그래머 스쿨을 확대하는 한편 학교도 신설할 것이라고 말했다.확대 금지로 그 수가 제한된 그래머 스쿨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주로 중산층 이상 학생들이 다닌다.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개인과외를 통해 시험에 대비해 진학하는 반면, 빈곤층 아이들은 소외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그래머 스쿨에서 무상급식을 받는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 학생들은 3%에 불과하다. 이들은 가구 소득이 연간 1만6000파운드 이하이거나, 특별 복지수당을 받는 이들을 말한다. 평준화 공립 학교인 종합학교에서 무상급식 수혜 학생 비율이 18%인 것과 대비된다. BBC는 지난 18일 자체 조사를 통해 그래머 스쿨 대다수가 빈곤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163개 그래머 스쿨의 입학 정책을 분석한 결과, 90개 학교가 무상급식을 받는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상급식 수혜여부는 사회적 박탈의 척도로 활용된다)◆그래머 스쿨, 반대도 만만치 않아= 보수당의 지지를 받는 메이의 새 정책은 노동당과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메이 정부는 새로이 설립하는 그래머 스쿨이 저소득 가정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은 불평등과 불이익을 심는 정책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래머 스쿨 확대 반대론자들은 특히 그래머 스쿨이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교육을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국 교육기준청(Ofsted) 청장인 마이클 윌쇼는 지난 15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메이 총리가 그래머 스쿨에 집착하고 있다며, 브렉시트 이후 기술자 부족 현상을 해결하도록 직업 학교나 많이 늘리라고 촉구했다.윌쇼는 “그래머 스쿨이 더 많아지면 대다수 학생들의 교육 수준이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최근 수년간 공교육을 위해 이뤄놓은 성과를 무효로 만들고 사회적인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메이 총리에게 “브렉시트 성공을 바란다면, 그것이 정부의 최우선 의제다. 그래머 스쿨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메이 총리가 소수의 특권층이 아닌 다수를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SNS)에서는 “메이가 1950년대 그래머 스쿨 시대에 살고 있다”, “종합학교에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은데 불필요하게 그래머 스쿨을 왜 늘리려 하나?”라며 비판적인 의견도 올라오고 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