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가산 광흥사의 역사
안동의 주산인 학가산(鶴駕山), 옛지명:하가산(下柯山)의 핵심자리에 위치한 광흥사(대한불교 조계종)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중 하나이다.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AD 661-668)때 의상대사가 창건했고,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쳐 500여 칸이 넘는 전각이 있던 안동지역의 최대 사찰이었다. 한창 번창하였을 때는 일주문에서부터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전각들이 많았다고 한다.
학이 힘찬 날개 짓을 하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양을 한 학가산의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한 이곳은 고려와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되었고 세조대에도 간경도감의 안동분사로 지정되었다.
1827년(순조 27년) 9월 24일에 엄청난 화마로 시왕전과 일주문만 남기고 일시에 전소되었다.
1828년 중창불사를 거쳐 대가람의 위용을 갖추었지만 암흑기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사세가 쇠락하여 전각은 쇠멸하고, 또 한 번의 화재로 지금의 응진전과 명부전이 남았고 현재의 대웅전은 2001년에 준공되었다.
◇ 광흥사 설화
광흥사 인근에는 사게절 물이 마르지 않고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가지고 있다.
옛날 한 처녀가 원인모를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인지라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법력으로 병을 고치려고 광흥사 옆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로 들어갔다.
어느 날 밤 사찰 밖 바위에 가부좌를 튼 채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채 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처녀를 물어다 약수터 물에다 집어넣고는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린 처녀는 자신의 몸이 가뿐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아 물을 마시고 몸을 깨끗이 씻었더니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병이 깨끗하게 나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이라 생각한 처녀는 그곳에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그 처녀 비구니가 사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사람들은 호랑이와 그 처녀는 천상의 인연이 있어 호랑이가 데려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광흥사 입구에는 4-5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속의 썩은 둥지에는 큰 구렁이가 은행 열매를 따먹으며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래 전 주지 스님이 김 모씨에게 은행 열매를 팔았고, 가을에 김 씨가 은행나무에 올라가 은행을 따려고 하는데 나무둥지 속 큰 구렁이의 눈에서 서광을 비추는 바람에 기절하여 나무에서 떨어졌으나 다행히 생명은 구했다고 한다.
당시 주지 스님의 말에 의하면 은행나무에서 1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 샘에서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내려가 보니 큰 구렁이가 샘물을 마시고 나무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구렁이의 비늘에 일주문 단층색이 닿아 번득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은행나무의 남쪽 썩은 부위에는 구렁이가 나다니는 반질반질한 흐넉이 있어 어두운 밤이면 부근 사람들이 가길 꺼린다고 한다.
광흥사 옹진전에서 가까운 산정마루에 약 300여 평 되는 동대마당이 있는데 지금도 광흥사 행사가 있을 때면 신도들이 이곳에서 놀이를 하기도 한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 예천군 예천읍 본리동에 살던 주 모씨가 죽자, 망자의 사위인 김달성이라는 사람이 천하명당이라 소문난 동대동 광장에 장인을 묻기로 하고, 여름날 광흥사의 스님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지관을 데려다 묻을 자리를 정한 후 20여 명의 장례꾼들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때 공중에서 귀를 찌르는 불호령 소리로 “어느 중생들이 감히 이 신성한 불지를 더럽히는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십 명의 고승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일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구며 시체가 든 관을 내팽개치고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나자 그 고승들도 광흥사로 들어갔는데, 당시 광흥사의 10여 명 스님들은 꿈자리가 하도 어수선하여 똑같이 잠에서 깨어나 동대광장에 가 보았더니 매장도구들과 시체를 버리고 간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뒤 매장꾼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스님들은 바로 웅진전 나한님들이 스님으로 화해서 매장꾼을 쫓고 이곳에 묘를 못 쓰게 했던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 광흥사 전각
? · 응진전
1647년(인조 25년)에 건립된 응진전에는 소조 석거삼존불상, 소조 아난·사섭존자상, 소조 16나한상·동자상 16위, 제석·사자상 4위가 모셔져 있다.
· 명부전
현재 은닉 중인 ‘훈민정음해례본’이 도굴되었던 곳이며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목조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 산령각
상단에 칠성탱화와 석조석가모니부처님을 개금하여 모셔놓고 우측 단에 산신탱화 호랑이를 탄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 · 대웅전
2001년에 신축 준공되었으며 1886년(고종 23년) 왕실 발원으로 용호 스님 등이 발원하여 조성한 ‘아미다불후불탱화’가 대웅전 좌측 단에 봉안되어 있다.
? · 일주문
대가람의 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겨쓴 400여 년 수령의 웅장한 으냉나무를 배경으로 일주문이 유려하게 있다.
◇ 광흥사의 문화유산, 성보(聖寶)
광흥사는 천년고찰로서 정확한 건립연대나 그동안의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사적으로 보아 안동 최대의 가람이었음을 증명하는 성보(聖寶)가 남아 있다.
취지금니묘법연화경 권 3·4(보물 제314호)는 1366년(공민왕 15년) 이전에 권도남의 시주로 감지에 금니로 쓴 고려사경(필사본 2권2첩)이며,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315호)은 1389년(공양왕 1년) 묘우가 백지에 묵서한 고려사경(2권2첩)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광흥사 동종(보물 제1645호)은 17세기 전형적인 전통 종으로 조선 중기의 동종이다. 서울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안동 광흥사장 금자사경(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3호)은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의 어록과 발원문이 있어 세종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흥사 ‘월인석보’ 권 21은 1459년(세조 5년)에 간행된 유일한 초간본으로 2013년 복장유물 해체조사에서 명부전 시왕상에서 권7·권8·권21(2권) 총 4권 487장의 ‘월인석보’가 발견됐다.
발견된 권21 2권 중 1권은 현재까지 동일한 내용이 없어 초간본으로 추정된다. 동일한 가치의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광흥사 ‘월인석보’도 보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보존처리과정을 거쳐 ‘월인석보’ 권7·권8 각 1권과 ‘종경촬요’, ‘관흥사 중건 사적’, ‘광흥사 중수 상량문’과 보물 1645호 광흥사 동종이 함께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상설전시 중이다.
광흥사는 다양한 불경언해서와 불서를 간행한 자료를 통해 간경도감의 안동분사로 불경간행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간행한 불서는 모두 23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16세기에 집중된 불서는 모두 목판본이다. 그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1532년)’,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 ‘금강반야바라밀경변상(1571년)’, ‘몽산화상육도보설(1534년)’, ‘불설대부모은중경(1562년)’등이 있다.
또한 광흥사는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장했다. 그 추정이유는 광흥사는 조선시대 때 간경도감의 안동분사였으며, 1952년 11월 12일 동아일보에 월인석보 21권과 그 판본 222장, 동15장의 훈민정음 판목 400여 장이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있고, 최근 2013년 훈민정음해레본영인본 봉안법회 이후 명부전 시왕님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고서와 고문서 총량은 4,000점이 넘는다. 새로 발견된 자료에는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는 초간본 월인석보 권21(1459년)과 고려시대 1213년에 간행된 ‘종경촬요’, 1464년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는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
◇ 광흥사와 훈민정음의 길(道)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창제했다고 하는 역사는 누구나 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과 세자(문종), 수양대군(세조)과 신미대사, 수미, 학조, 학열 스님이 주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서문은 54자, 언해문은 108자이며 훈민정음은 모음 11자, 자음 17자 총 28자로 전환이 무궁무진하고 간편하고 요긴하며, 해례편에 창제에 관련된 산문형식 뒤에 칠언고시 형태의 운문식 결(決)로 압축한 것은 경전의 게송 형식을 취하였고 불교의 법수(法數)와 핵심이 고스란히 깃들어져 있다.
광흥사는 훈민정음해레본의 소유권을 넘어서 훈민정음해례본과 시절 인연을 잘 받들어 연구하고 공부한 끝에 상구보리하와중생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지혜의 바다로 이르게 하는 불교의 방편과 세종대왕의 창제 진의(眞義)가 상통하므로 훈민정음의 길(道)을 가게 되었다.
2015년 1월 7일 광흥사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훈민정음에 깃들어진 우주 철학인 음양오행과 천지인 삼조화사상을 쉽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훈민정음도(訓民正音圖)를 창안해 내었다.
훈민정음도만 있으면 우리 겨레의 문자 훈민정음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길을 알지 못해 괴로움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누구나 쉽게 익혀 편케 쓰는 문자를 가르쳐 궁극에는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찾도록 한 대승보살의 길이며, 천지 모든 소리의 이치를 살펴 만든 훈민정음은 곧 관세음(觀世音)이 되는 것이다.
훈민정음도는 불교의 십이연기와 사성제와 팔정도 등 불교 진리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는 만다라와 같다.
◇ 범종 스님(주지)과의 만남
광흥사 주지 정음(正音) 범종 스님은 종단업무를 맡아 평일에는 사찰을 비우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주말에는 기거하면서 불사와 성지순례자들을 위해서 훈민정음에 대한 법문을 하고 있다.
범종 스님은 “광흥사는 훈민정음해례본 사건을 기점으로 불교와 훈민정음창제 역사를 이야기하는 기저(基底)역할을 자처하며, 더불어 불교와 훈민정음의 핵심사상과 철학이 불이(不二)이기에 21세기 가치전환 시대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미혹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진리의 근원을 제공하고 그로부터 현상과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 인간 완성(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데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덕수 기자 duksoo11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