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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고파·오고파·보고파

뉴시스 기자 입력 2016.09.21 15:51 수정 2016.09.21 15:51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짓는 사람이다.노산 이은상선생님께서 생전에 내게 자주 들려주시던 말씁이다. 노산선생은 달변가지만 무의미한 다변가는 아니었다. 시조 ‘가고파’는 노산선생님의 대표작이자, 한국시조단의 대표작으로도 넉넉한 바가 있다. ‘가고파’는 10수로 된 장시조로 1932년 당시 문단으로선 혁명적 업적이었다. 시조 ‘가고파’가 발표되고, 상점옥호가 가고파·오고파·보고파 등 새로 된 참신한 옥호가 단골의 발길을 끌어, 사업(흥행)에 성공한 이들이 많았다. 이은상선생은 사람들이 무심결에 말하는, 이병기를 앞세워 이은상와 한국시조단의 쌍벽이랑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일제치하에서 시조라면 이은상의 독무대였고, 강호명사들도 일제시대 시조시인이라면 이은상말고 다른 사람은 떠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병기는 휘문고보 국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태준과 친분이 있어, 문예잡지 ‘문장’의 시조부문 신인상 추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후 이병기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되어, 서울대 제자들이 스승 이병기를 앞세워 이은상을 깔아 뭉기게(?) 됐다. 이은상은 평생지은 시조만도 2천수(편)을 헤아리고, 명시(명시조) 만도 2백편을 넘어 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은상은 스케일이 커서, 자기과시를 위한 꼼수를 전혀 쓸줄 모른다. 이은상을 옳게 모르는 사람은 이은상을 정치 시인이라 곡해·단정을 하지만, 이은상은 시적 재능이 특출한 천재시인이요, 정치색에 오염되지 않은 진짜 순수 시인이다. 필자가 1967년경 여름, 이은상 선생님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집권자 박정희 대통령이 이은상에게 국회의장직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은상은 국가 2인자의 고위직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평생을 시만 짓는 순수한 시인으로 사는게 염원이라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박대통령은 서운해 하시면서 차선책으로 이효상을 국회의장으로 발탁하여, 3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케 됐다. 대부분의 이 땅 사람들은 국회의원후보 공천만 해준다고 해도 까무라칠 정도로 반기겠지만, 천재시인 이은상은 초대형 감투(국회의장)도 거지발싸게 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문학가(시인· 작가)는 고결한 인품을 갖추고,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겨야 한다. 좋은 글을 지을려고 끙끙대지 말고, 올 곧게 살면 좋은 글이 절로 지어진다. 필자의 오랜 체험 끝에 깨친 말이다. 좋은 작품도 몇 천편 남기고, 굵직한 업적을 수도 없이 끼치신 이은상선생(1903~1982)은 변변한 기념문학관·기념문학상 하나도 못 만든체, 정신적으로 노숙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지금 개인 문학관을 가진 이들도 꽤나 되지만, 노산 이은상선생 문학 업적의 1/10수준되는 사람도 드물다. 이은상선생에 대한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름다운 노랫말에 붙여진 이은상의 가곡 작품을 애창·열창하여 국민의 행복(웰빙)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노래를 즐겨 부르면 우울증이 36계 줄행량을 놓고, 마음에 평화가 좌정한다. 필자가 자료를 들추기 전에 머릿속에 압력된 이은상선생의 작품을 대강 적어본다. ‘가고파’(김동진) ‘그 집앞(현제명)’‘동무생각(사우)’(박태준) ‘옛 동산에 올라’(홍난파) ‘고향생각’(홍난파) ‘성불사의 밤’(홍난파) ‘봄 처녀’(홍난파) ‘대한의 노래’(홍난파) ‘장안사’(홍난파) ‘사랑’(홍난파) 등등 애독자의 머리가 덜 복잡하도록 노래곡목을 그만 적으련다. 시조·수필·역사 연구를 통해 정신적 금자탑을 드높게 세운 노산 이은상선생님은 국립서울현충원 국가 유공자묘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 역대 대통령묘역을 참배하는 이들도, 문학과 문화의 영원한 거인(거장)이신 노산 이은상선생산소도 참배하여, 정신적 행복을 공유하는 것도, 국민 행복지수를 높이는 중요방법이 될 것 같다. 노산이은상선생의 ‘노산시조선집’과 수필집 ‘무상’은 국민문학독본이 되고도 남을 한국명저이자, 세계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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