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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문호 노산 이은상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11.13 13:42 수정 2017.11.13 13:42

예수의 가르침은 세월이 갈수록 구구절절이 감명 깊게 다가오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찡하게 울려준다.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 확고부동한 대문호(大文豪) 노산 이은상 선생이 고향인 마산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으신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유인즉 노산 선생이 친일파라고 비하(卑下)한다니, 어떤 연유로 노산 선생을 친일파로 몰아붙이는지 터무니없는 명백한 오해요 지상 최대의 착각이다.노산 선생이 일제치하에 시조를 대대적으로 지어 민족정서를 자극한 것은, 문학을 통한 항일운동이었다. 이은상 선생의 처녀작(첫 작품)인 도, 고향이란 바로 잃어버린 조국(祖國)을 가리킨다. 작품 말미의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의 ‘때 묻은 소매’는 일제에게 짓밟힌 백의민족을 상징하고, ‘고향’이 그립다는 것은 일본에게 망한 조국이 그립다는 것이다. 작품마다 나라사랑이 넘쳐나는 희대의 애국시인(愛國詩人)을 친일파로 몬다니, 그렇게 단정하는 자들의 정신 상태와 저의가 의심스럽다.노산 선생은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일제치하에 한글연구활동을 하시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애국자 환산 이윤재 선생과 같이 함흥감옥에서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지내겼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 얼을 지키려다가 함흥감옥 감방에서 ‘ㄹ’자 같이 꼬부리고 지내셨던 것이다.함흥감옥에서 출감한 뒤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남 광양의 백운산 밑에서 숨어 사셨지만, 일경의 촉수에 걸려 광양경찰서에서 수감생활을 하시다가 광복을 맞았다. 이처럼 평생을 애국으로 지샌 노산 선생님을 친일파로 단정하다니 천벌 받을 짓거리다.노산 선생은 보통시인이 아니다. 백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천재 시인이다. 뛰어난 천재 시인이 몰지각한 화상들로부터 천대받다니 통분을 금치 못할 노릇이다.필자가 이은상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시조(오륙도 五六島)란 주옥편에서다. 셈씨의 묘미를 살리고, 인생을 달관한 천재 시인이 아니라면 지을 수 없는 명작 시조였다.노산 이은상 선생은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자작시가 가장 많이 작곡되었다. 작곡가도 천재 작곡가들이 이은상 선생의 시에 다투어 곡을 붙였다. 홍난파·박태준·김동진 등 이 땅 최고의 작곡가들이 이은상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것은 , , , , 등 편편이 주옥편이 아닌 것이 없어 많은 국민들이 지급도 흥겹게 애창하고 있다.박태준은 노산의 을 작곡하여 지금껏 결혼 축가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김동진이 작곡한 는 애국가 이상으로 애창되고, 향우회를 할 때마다 주제가로 각광을 받는다. 노산이 예찬한 마산 앞바다는 요사인 노래에서만 청정바다로 남아 있다.필자가 1967년 첫 시집 의 머리말을 부탁드리기 위해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이은상 선생 댁을 찾아가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제3공화국 출범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노산 이은상 선생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하고자 제의가 있었지만, 끝까지 시인으로 사시겠다는 이은상 선생의 뜻을 박대통령도 이해하고, 이효상 씨가 국회의장직을 맡게 됐다. 국회의장직 제의를 극구 사양한 것만 봐도, 노산 이은상 선생은 시정신이 살아 있는 고결한 선비였다.워낙 유명한 이은상 선생이지만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사람도 있듯이, 이은상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도 수필집 의 작자라면 이내 알아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산 선생은 시(시조)수필의 최고봉이었다.필자는 이은상 선생의 시조선집(480쪽)을 50번 독파(讀破)하여, 노산의 시세계에 완전히 심취케 됐다. 얼마나 잘된 시조집이었으면 500쪽 분량을 50번이나 독파했겠는가? 지금도 생각나면 을 뽑아들 정도로 감칠맛이 그저 그만이다.노산 이은상 선생에 대한 오해는 그분의 주옥시집(珠玉詩集)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보람 있게 살고 싶으면 과 을 일독(一讀)해 보시라.대문호 이은상 선생을 이 땅에 보내주신 신(神)께 절로 영광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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