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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강열전(四姜列傳)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9.03 14:39 수정 2017.09.03 14:39

문경시가 낳은 조선시대의 명신을 발굴하여, 역사적 자부심이 희박한 문경시민들의 자존심을 일깨워 주고, 오늘은 보람 있게 사는 문경시민과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면, 글을 쓰는 보람이 더욱 커질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오늘 필자(나)가 다루는 사강(四姜)은 강사상좌상·강좌상 아우인 강사필(관찰사), 강좌상의 아드님인 강신(좌참찬·정2품), 이 상 네 분의 약전(略傳)을 소개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약전의 순서는 1.강사상(좌상) 2.강사필(관찰사) 3.강신(좌참찬) 4.강홍립(한성부 우윤) 이상 네 분의 약전을 살펴본다.●강사상(姜士尙)(중종14년 1519 ~ 선조14년 1581)= 본관이 진주, 자가 상지, 호는 월포, 대사간 강형의 현손, 사인 강온의 아들로 산양면 존도리에서 태어났다. 중종 38년(1543)에 진사가 되고 명종 원년(154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1552년 헌납 정언이 되고, 1555년 사인 전한 직제학을 역임하고, 1557년 동부승지 좌승지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99년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와서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선조 즉위 후에 실록청 동지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66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선조-7년(1574) 한성부 판윤 2년후 우참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천성이 엄정하여 법도가 있고, 말과 웃음을 절제하며 평시에 아무리 더워도 외관을 흐트림이 없었다. 은퇴할 준비로 자제들이 작은 전답을 마련코자 하니‘벼슬하는 사람들이 물러가지 못할까 걱정이지 물러가 살 곳이 없을까 걱정해서 되느냐’고 하였다. 천성으로 학문을 즐겼으며 특히 강목 대학연의를 좋아하였다, 청백한 마음가짐으로 일관하여 문 앞에 잡된 손이 찾아오지 않았다. 상위에 4년간 이었으나, 장목함을 가져 기상은 산악과 같고 용모는 심연과 같았다, 시호는 정정 이다.●강사필(姜士弼)(중종 21년 1526~선조9년 1576)= 본관이 진주, 자는 경유, 호는 소암, 우의정 강사상의 아우로 명종 원년(1545)에 진사가 되고 10년(1511) 식년문과에 병과로 뽑혀 한림, 홍문정자, 이랑, 호당, 승지,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충청강원감사를 지냈다.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 여양포에 이르니 달로가 몰려와서 성을 에워싸자 성중이 흉흉하여 갈 바를 모를 때 도 장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굳게 지키고 군관들로 하여금 결사 대적하게 하니 적이 물러갔다. 총병 양조가 이 사실을 명제에게 알려 후한대접을 받았다.●강신(姜紳)(1543~1615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본)은 진주, 호는 동고, 생부는 우의정 강사상이고 사안(士安)에게 입양됐다. 1567년(명종 22년)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1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589년 문사랑으로 정여립 옥사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에 봉해졌다. 1592년 승지·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 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대사간을 역임했다. 정유재란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 관찰사 1609년 우참찬 1610년 좌참찬(정2품·대감)을 역임했다. 시호는 의간이다.●강홍립(姜弘立)(1560~1627 인조5년)=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본)은 진주, 호는 내촌 좌참찬(정2품) 강신(姜紳)의 아들이다. 1597년 알성문과 을과(2등급)로 급제, 설서·검열 등을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보덕이 되고, 1609년 한성부 우윤(서울시 제2부시장·종2품)등 여러직을 거쳐 1618년 진녕군에 봉해졌다. 이 때 후금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했는데,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어쩔 수 없이 명(明) 에 원군을 보내게 되어, 강홍립이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군사 1만 3천을 이끌고, 출병했다. 조·명연 합군이 후금군과 부차에서 싸웠으나 대패하며, 살아 남은 군사와 함께 후금에 투항하고, 참전이 부득이 했음을 알렸다.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것은 광해군의 밀지였다. 강홍립은 10여년간 후금에 머물다, 정묘호란때 선도가 되어 귀국하여, 강화를 성립시키고 국내에 머물었다가, 역신으로 몰려 삭탈관직됐지만, 죽은 뒤 인조가 복관시켰다. 강홍립은 빛과 그늘이 있는 풍운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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