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격언에 ‘사람들은 나쁜 일을 당하면 대리석에 새겨두고 좋은 일을 당하면 먼지에 써둔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측면을 꼬집는 말이다. 미디어 매체 사회면을 꼼꼼히 살펴보면 칭송하고 찬사를 보내는 기사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신 비판이나 비난 등 분노를 드러내는 기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배우 오드리 헵번은 인생 말년에 아프리카 난민 구호활동에 헌신해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고귀한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 속에 갇혀있지 않은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다. 심신은 정직한데 정신적 영역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최고라고 믿는다. 이는 일방적인 자기관점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는 것과 같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관대하고 정신적으로 열려있으며 자신의 우주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타인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볼 줄 안다. 고귀한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금(昨今)의 시대는 진실보다 정보다 옆길로 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인지 모르겠다. 원래 인간이란 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갖고 있다고 도 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부와 성공 그리고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편법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때 욕심이 앞서면 명예와 대의명분보다는 소신의 이해득실을 따진다고 한다. 그 결과 사태를 그릇되게 이끌어내는 선택을 하게 된다. 가치 판단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확신을 갖지 못하면 한쪽에 있는 선과 또 다른 쪽에서 있는 악이 모두 중요해 보인다. 이 때문에 진실은 지독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한다. 역사학자들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 그릇된 이념적 이데올로기가 득세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도덕적 지적으로 허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악과 부정은 당장 눈앞에서는 이득을 가져다주지만 머지않아 곧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얕은 이득에 빠져 자기를 기만하기보다는 꿋꿋이 양심을 지키는 보수(保守)들을 보면 혼탁한 미래사회에서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느껴진다. 그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늘 배움의 자세를 갖고 있으며 반대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안다. 그들은 또 분명하게 자기계획을 제시하면서도 반대의견을 경청한다. 타협을 잘해 서로를 이해하게 한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주변을 통제할 수 있는 위엄이 갖추어진다. 유대인속담 ‘탈무드’에 이런 일화가 있다. 유대인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선량한 우리에게 왜 억압당하고 박해를 받게 하는 것일까? 왜 착한사람은 고통 받고 악한사람은 편안하게 사는 것일까? 그들은 종교적 믿음에서 답을 찾았다. 하나님은 선한사람에게 상을 내릴 것이며 악한 자를 심판할 것이다. 시대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착해서 얻게 된 실익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착하게 살아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웃사회란 선물이 있다. 아무런 대가없는 이웃사회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물이다. 보답 없는 이웃사회 은덕을 베푸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다. 악이 횡행하는 이웃사회에 베푸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웃사회 난(難)사태로 빚은 재앙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군상을 보면서 저 참혹한 난(難)의 현장을 매체로 통해 접할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보는가? 이런 참혹한 현상이 대한민국(大韓民國)에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보면서 ‘난(難)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오늘이다. 욕심으로 멸망해도 버리지 못하는 편견(偏見)이 안타까울 뿐이다. 작금(昨今)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땅에서 지칠 줄도 모르는 편견(偏見)의 갈등이 연속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힘든 편견(偏見)의 연속으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약한 자의 시비(是非)가 언제까지 계속되려는지? 취(取)할 수 있는 지혜는 편견(偏見) 때문에 버렸는가? 나라마다 보복의 잣대는 편견(偏見)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