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딴 학문을 공부하는 것 보다, 훨씬 재미가 쏠쏠하다.지금까지 필자(나)가 의문을 품고 살던 역사의 참뜻을 발견했을 때, 진리를 깨달은 법열(기쁨)이 각별하다. 이런 재미를 가끔 발견하는 재미를 알기에 반세기(50년)도 넘는 세월을 사학도(史學徒)로 살아 왔다. 일류 공영방송에서, 문경을 역사와 선비의 고장이라 소개할 때 마다 필자(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오늘날 문경시는 조선시대엔 함창현·문경현·예천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순수하게 문경시의 이름을 띈 문경현은 이렇다 할 명신(名臣)과 학자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문경현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강 이강년의 병장이다. 이강년 장군은 가은 출신으로 세종의 2남 효령대군의 후예로 고종때 무과에 급제한 전통성을 갖춘 무장이다.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뒤, 항일의병을 일으켜, 일제에게 끈질기게 항쟁했으나, 발목부상으로 일군에게 붙잡혀, 1908년 서대문 감옥에서 의연하게 교수형을 맞이했다. 향년이 50세였다. 독립기념관에 이강년대장의 흉상이 봉안되어ㅡ 독립기념관을 찾는 참배객들이 이강년 장군의 흉상앞에 묵념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조선시대때 상주목 출신으로 정승(영상·좌상·우상)이 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는데, 노수신영상은 순수한 상주출신이요, 강사상좌상은 상주, 산양, 교동 태생으로,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문경시 출신이다. 강사상(1519~1581)은 조선중기 문인으로 본관(본)이 진주. 온 의 아들이며, 사필의 형이다. 1546년(명종1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도승지·형조참판·경상도관찰사·대사헌때 조광조 신원을 건의했고, 한성판윤 1578년 우의정에 오르고 전쟁에 초연했고,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이 되었다. 강직한 성품에 초연한 자세로 관리 생활을 했는데, 후세에 조명이 약했는데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고 학문하는 보람을 만끽했다.강사상의 아들 강신은 참판을 지냈고, 그 아들이 강홍립이다. 강홍립(1560-1627)은 조선 광해군때 도원수였다. 1619년(광해군 11년) 명나라 군과 함께 심천싸움에 출전하여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그 후 후금에 10년간 살다가 청나라 군사와 함께 정묘호란때 돌아왔으나, 역신으로 몰려 죽었다. 그가 죽자 인조는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강홍립이 청군에게 항복한 것은. 그의 자의가 아니라 전황을 보아 향배를 지혜롭게 결정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광해군의 신흥강국인 후금에 대한 중립외교는 현실을 직시한 광해군의 슬기로운 외교 정책이었지만, 맹목적인 사대에 젖은 당인(서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문제삼아, 광해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는다. 인조의 일방적 친명외교가 정묘호란·병자호란의 대란을 불러, 국토가 초토화되는 대참극을 자초했다.강사상좌승이 조선의 고관이 거의 없는 문경지역에서 현창되지 않은 것은, 후손들이 선조(강사상좌의정)를 업고 북을 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강사상정승의 친손자가 유학자들이 명에 대한 배반자로 증오하는 강홍립도원수의 친할아버지라는 것도, 은연히 크게 작용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강사상좌상은 언관(言官)시절에, 권신 이량의 비행을 규탄하다가 좌천을 당한 강골이었다. 조광조의 복권을 주장하는 것은 당시로선 자신을 몰락하게 하는 화근이 될 수 있었지만, 옳은 도리는 그냥 보고 지나지 않았다. 직언의 강골대감 강사상좌상과 국가안보를 위해 슬기로운 처신을 한 강홍립 도원수에 대해 국익을 지킨 충신으로 재평가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역사의 순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