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子産)이 죽자, 온 백성이 몸의 장식을 떼어내고, 부인들은 귀고리를 푼 채, 부부들이 골목에 나와 통곡하였으며 석 달 동안 나라 안에 노랫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공자가 죽었을 때 노나라 사람 누구하나 애통해 했다는 소문은 없었다.자산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공자와 필적할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까? 중국의 모든 사상가와 역사가 등 그 누구 하나 자산을 거론하여 자신의 입론을 펴지 아니한 자가 없을 정도로 그에 대한 칭찬과 일화는 크게 넘쳐났다. 춘추시대 조그만 정(鄭)나라, 자산이 재상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한 지 5년, 나라에 도적이 사라졌고, 길에서 남의 물건을 주워 갖는 일도, 가로수 열매에 손을 대는 자도 없었다. 게다가 3년간 흉년이 백성을 괴롭혔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굶는 사람은 없었다 한다. 또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회오리 속에서 호랑이 먹이처럼 열국의 한 가운데 위치했으면서도 무려 20여년이 넘도록 안녕을 구가하였다 전해온다. 주공(周公)은 혁명가였고, 자산은 실천가였으며, 공자는 문헌정리가였다. 공자는 꿈속에서도 주공을 그리워하였고, 이를 실행한 자산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자산의 다스림은 한마디로 순류(順流)의 정치, 은혜의 행정이었다. ‘좌전’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정나라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향교의 뜰에 모여 정치를 비판하였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연명이라는 관리가 아예 향교를 헐어버릴 것을 자산에게 제의 하였다. 그러자 자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론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큰 물결로 변해 크게 다치기 전(前), 작은 물줄기일 때 미리 흐를 길을 터 주어야 합니다. 그곳에서의 비평은 내가 장차 실행할 것과 고칠 것을 일러주는 훌륭한 방향타인데 어찌 이를 없애겠습니까?” 그러나 자산의 이러한 지혜와 덕을 바탕으로 한 정치도 더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맹자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자산은 자신의 수레로써 사람들을 태워 물을 건네주곤 하였다. 이를 두고 맹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은혜는 좋으나 옳은 정치는 아니다. 다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만약 환심을 사려한다면 날마다 백 명의 자산이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자산의 꿈’은 이러한 자산의 온갖 일화와 흩어진 일대기 기록 조각들을 모아 소설로 재구성한 것으로, 하희(夏姬), 강태공(姜太公), 맹상군(孟嘗君)등 중국 고대의 인물들을 하나씩 짚어온 미야기타니 마사미쓰의 작품이다. 복잡하게 얽힌 인물과 시대상황을 명료하게 줄기를 잡아, 시간의 선후, 공간의 좌우가 입체를 이루고 있다. 중국 고전이 다 그렇듯이 결국 인(人)을 만상의 중앙에 놓고, 천(天)은 본받으며, 지(地)는 생육을 돕도록, 덕과 순리로 그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불변의 원칙을 확인시켜 주는 참한 읽을거리였다. 그는 춘추전국의 난세에서도 정도(正道)를 구한 재상이었다.춘추와 전국시대 중국의 문화가 가장 왕성하게 발전한 이 시기는 권모와 술수, 전쟁과 살육, 혼돈과 갈등이 한 데 엉켜 거대한 마찰음을 일으키던 때다. “자산의 꿈”은 춘추 말기 약소국인 정(鄭)나라에 태어나 안으로는 토지개혁과 법치 확립 등으로 내부질서를 확립하고 강대국인 진(晉)과 초(楚)의 사이를 오가며 현실적인 외교에 치중한 명재상 자산(子産)의 일대기를 소설로 복원한 책이다. 우리는 반드시 정도(正道)를 추구한 자산의 도덕적 이상을 우리는 현실에서 되새겨 일구어야 한다. 봄도 아닌데 느닷없이 칼바람이 비집고 들어선다. 어느 시대나 현재는 늘 난세다. 지나고 나니까 그때가 좋았다 싶은 적은 있어도, 눈앞의 현실은 언제나 답답하고 한숨만 난다. 독선에 빠진 임금이나 부화뇌동하는 신하들은 언제나 있었다. 언로를 막고 서서 시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불패. 곧 공정의 잣대를 바로 세울 자사가 온다. 뒤이어 정위 장석지의 힘도 보탤 것이다. 난세(亂世)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탁받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확실하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