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대철인중 S-P-A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중 음악과 시(詩)를 최고의 예술로 평가했다. 크게 깨달은 세계적 대철인이라 그런 분류를 한데는 틀림없이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 더 말할 여유가 없다. 장신(長身).미모의 50대 초·중반의 여가수 서지오가 불러 크게 대박을 터뜨린 노래가 ‘돌리도’다. ‘돌리도’는 작곡창고라는 별명의 박현진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다. 대중가요를 비교적 상세히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나)도 곡목 ‘돌리도’가 무슨 뜻인지 느낌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돌리도’는 외국인 이름 같고도 하고, 히프(엉덩이)를 돌린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기회에 작곡가 박현진 씨가, ‘돌리도’는 ‘돌리조’라는 대구(경상도)사투리라고 하니, 그 뜻이 명쾌해졌다. 전국노래자랑에 나온 여성 아마추어가 ‘돌리도’곡목을 부르며, 엉덩이(궁둥이)를 돌리기 위해 애쓰는 걸 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틀림없이 저 보살은 ‘돌리도’의 뜻을 헛다리 짚고 있는게 분명하다. ‘돌리도’는 ‘엉덩이를 돌리라’라는 말이 아니라, 떼먹은(사취)한 내 사랑을 돌려줘.(반납) 하라는 뜻이다. 앞으로 이 노래를 가지고, 노래자랑에 출연하는 여자 아마추어는 요분질(히프돌리기)을 하는 난센스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쩌다 대중가요통(通)이 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상당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군복무를 서울에 있던 육군본부에서 한 필자는(1961년/1962년)우연한 기회에 그 때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서울 중구 태평로 KBS라 디오 공개홀에서 국군의 방송위문 공개 방송이 있는 것을 육본 같은 내무반의 전우들과 방청을 하게 됐다. 필자(나)의 경우는 육군본부 부관감실행정병으로 근무하여 방청권이 없어도, 자유롭게 방청을 할 수 있었다. 국군의 방송 ‘위문열차’에는 당시 국내 정상급의 실력파 가수들만 출연하여, 방청자체가 그런 호사가 없었다. 당시 육군본부 사병들은 병영분위가 부드러워 즐겁게 복무를 했는데, 하필 필자(나)는 99%의 분위기 좋은 내무반에 있지 못하고, 1%밖에 안되는 지옥(!)내무반에 걸려, 매주 1회씩 어김없이 뱃트세례를 받았다. 나보다 군에 9개월 앞서 입대한 남도(南道)출신 고참병들이 똘똘 뭉쳐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배트를 맞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아무리 길어도 새지 않는 밤은 없다. 남도(南道)출신 고참병들이 제대하고, 구타로 엉덩이에 굳은 살이 박힌 나는, 도합 천도(천대)의 몽둥이 찜질을 당했지만, 하급자에게 부지깽이로도 한데 때리지 않고 제대했다. 나는 뱃트 1000대를 맞고, 졸병(하급자)에게 부지깽이 맛도 한번 베풀지(?)않았으니, 스코어가 1000:0이지만, 나는 완패(完敗)가 아닌 완승(完勝)을 했다고 자부한다. 구타를 많이 당했지만, 불구자가 되지 않은 것만도,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한다. 내무반(사병숙소) 분위기가 험악했기에, 일요일 오후에 방청하는 방송국 ‘위문열차’프로는, 몽둥이 폭력의 암담한 현실을 까맣게 잊게 하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속담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이다. 1961년과 1962년에 걸쳐, 주 1회 도합 100여회에 걸쳐, 방청한 일류가요쑈 ‘위문열차’는 내 인생을 통털어도 ‘10대 경사(慶事)에 든다 하겠다. ’위문열차‘사회자 후라이보이(곽규석)의 재치있는 멘트중, 당시 젊은 미성·미모의 최고 인기가수 박재란양을 ’백만불의 아가씨 박재란 양‘이라 소개했다. 당시 1960년대초의 우리나라 국민 소득은 60달러를 넘지 못했다. 당시(1961년·1962년)좋은 노래를 불러 줬던, 송민도 여사와 박재란 씨는 수백만 청춘 남성의 참신한 애인이었다.고통도 쾌락도 다 지나간다. 좋은 추억만 간직하면, 인생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