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가수만 2만 명을 돌파한 게 아니라, 문인(?)도 2만 명에 육박 내지는 돌파했다고 봐도 틀림이 없다. 남조(濫造)된 신생 시인의 문제점은 시 창작능력이 취약한 것 못잖게 문단사(문학사)에 대해 전혀 지식(상식)을 못 갖춘 수준이하의 문회한이라는 점이다. 남조된 신품시인은 문인의 평가기준도 못 갖춘 주제에, 문인 등급을 멋대로 객관성도 없이 판정하고 있다. 똥과 된장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딱한 형편이다. 필자는 올해로 기성문인이 된지 만47년을 돌파하고 48년파에 접어들었다. 반세기에 걸친 기성작가(시인)로 지내는 동안 불황기도 없이 창작활동에 정진해 왔다. 필자의 한결같은 창작열의도 작용이 컸겠지만, 신(神)의 돌보심이 큰 힘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지난해 구미에서 있었던 ‘전국 주요시인 50인 시화전’에 대상자로 선정되어, ‘시 못 짓는 이유’를 전시했다. 서울의 김종천 시인은 힘주어 악수를 청하면서 “김시종씨는 1970년대 최고시인으로 날렸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천 시인의 일깨움 덕분에, 1970연대 초 30대 초반의 젊은 시인이었던 필자의 지난날을 잠시 뒤돌아보게 되었다. 시(詩)는 누가 뭐래도 그 시대의 반영이다. 당시는 유신의 전성시대로, 의식(시대정신)이 있는 시인이라면 이땅의 민주화가 화두(話頭)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활깇타게 시 창작 활동을 해 왔지만, 당대 문단 안팎으로 관심을 모았던 3대 문제작인 불가사리(현대문학 1972년 2월호), 도로고(월간문학 1974년 12월호), 수로가(시문학 1975년 3월호)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불가사리’는 현대문학에 실려, 당시 자유를 갈망하던 문단 안팎의 지성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평론가 백승철교수가 월간문학(1972년 3월호) 시월평(詩月評)을 통해 불가사리 조명에 할애하고, 시문학 월평과 서울신문에도 불가사리를 언급했다. 필자가 지은 불가사리는 당시 천하무적의 권부(權府) ‘증정’을 풍자한 것으로, 필화가 조금 캥기는 대담한 비판이었지만 시적 상징 덕분에 탈 없이 넘어갔다.당시 필화를 일으킨 K씨도 상징을 적절히 활용했으면 모진 고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로고(道路考)’는 1974년 월간 문학 12월호에 실렸는데, 길이가 다섯줄 밖에 되지 않는 단시(短詩)였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메가톤급이었다. 유신을 반대하는 야당인사 탄압을 절묘하게 비판한것인데, 도로 포장공사 현장을 지나면서 즉흥적으로 지은 단 5행이 고작이다. 다섯 줄 가지고 시가 될까 염려도 되었지만, 더 늘이지 않고 그대로 두어 대작(大作)으로 남게 되었다. 시를 지어도 철학과 뱃장이 있어야 한다. 도로고는 필자의 시비로 세워졌고, 영억(英譯)이 되어 미국인에게도 회자된 바 있다. 도로고(道路考) - 김시종//포장된 도로 밑에는 / 많은 돌들이 감금되어 있다. / 아스팔트를 밟으면 / 폭신한 느낌 뿐 / 강경한 돌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월간문학 1974년 12월호)도로고는 당시 월간문학 시월평(詩月評)을 맡았던 신경림 시인이 필자의 졸저 낙법(10행)과 함께 월평의 전 지면을 도배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아, 시골중학교 교사이던 30대 초반의 신진시인에게 큰 격려가 되어 주었다. ‘수로가(水路歌)’는 1975년 시문학 3월호에 발표한 작품인데, 당시 한국 평단(評壇)의 최고 거목(巨木) 평론가 김우창 고려대교수에게 발굴되어 격찬을 받은 작품이다. 촌놈(필자)이 당시 최고 일간 신문인 동아일보에 사진이 실리고, ‘이달의 최고 정치시’라는 평판을 들었다. 동아일보에 난 필자 사진을 보고, 후르시초프 수상을 닮았다는 농담을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수로가가 시문학에 발표되고, 동아일보 월평(月評)에 올랐던 시기는 유신의 전성기요, 긴급조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수로가는 유신을 기술적으로 비판한 양심적인 시였다.수로가의 3련과 4련만 간단히 소개한다. 수로가(水路歌)-김시종//-3련- 일만 어족을 거느리는 / 짐의 위세로서도 / 뭇 입은 불감당이로구나. //창맹의 입은 / 항문보다 더러운 지고.//-4련-수로부인을 내놔라! 내놔라! / 용왕은 되레 소리에 붙들린다. //이글이글 진노가 치솟을수록 / 용왕은 대중 속으로 침몰한다. (시문학 1975년 3월호)이 땅의 민주화는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용기 있는 이들이 하나하나 주춧돌이 되었다. 하루속히 억지와 떼법은 사라지고 참된 정의와 사랑, 평화가 이땅에 군림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