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결국 자기가 닦은 길로 다니기 마련이다. 공군전우회 문경지회가 영강의 의인 공군상사 김세광의 추모비 앞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다. 추모비를 세우게 된 것은 문협 문경지부가 주동이 되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밝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던 당시 문경문협 지부장 김시종 시인의 특지독행으로 추모비가 세워지게 됐다.
신문에 보도된 김세광 상사의 미망인 이선희 여사를 김시종 시인은 산북중학교 제자로 알았다. 김시종 시인의 어머니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한평생 미망인으로 어려운 인생을 살았다. 이선희 여사를 산북중 제자로 확신케 된 김시종 시인은 제자의 부군인 김세광 상사의 추모비를 꼭 세워 드리기로 뜻을 굳혔다. 영강의 의인 김세광 상사는 영순면 포내리 입구 문장사 표지석 옆에 추모비가 서 있다. 처음 추모비를 세울 때는 문장사(절) 표지석은 없었는데 뒤 늦게 세운 절 표지석이 추모비를 가리는 자리에 세워져, 추모비를 어중간하게 만들었다. 표지석이 없어도 절의 위치는 익히 알고 있을 텐데 추모비를 어중간하게 만들었다.
김세광 상사는 자기 젊은 생명을 기꺼이 바쳐, 익사직전의 어린이(우재현·9세)를 구해 낸 너무 감동적인 인간애를 지니신 분이었다. 나와 김세광 상사는 김세광 상사 생전에는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김상사님을 제자 이선희 여사의 부군으로 알고 추모비 추진을 첩첩히 쌓인 애로를 극복하고 확실하게 실천했다. 김세광 상사가 생전에 섬기던 ○○제일교회 이모 목사님께 김세광 집사의 추모비 건을 진지하게 건의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고, 문경M원 K사무국장께 호소했지만, 쉽게 웃어 넘겨,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속설(俗說)이 진리임을 확신케 됐다.
나 김시종은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우재현 어린이의 재적교인 성남시 검단국교 교장선생님께 창자에서 끓어 오르는 애틋한 사연을 적어 보내, 두달만에 당시(1989년) 70만2천7백원의 추모비 건립기금을 검단국교 아동들이 참여하여 보내 사고현장에서 가까운 영강변에 세워지게 되었다.
김세광 상사의 추모비는 김세광 상사 공군부대 안에도 1기(基)가 세워졌다. 부대안 추모비도 필자의 간절한 호소로 빛을 보게 되었다. 80년대 우리 국군의 이미지는 국민에게 군림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겼지만, 김세광 공군상사의 익사직전의 초등학교 3학년(우재현) 어린이를 구하고 대신 순직한 것은 군의 이미지 개선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김세광 상사님의 부인 이선희 여사는 뒤에 김시종의 제자가 아닌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밝혀 졌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내겐 다행이었다. 추모비를 기획하고 모금하는 업무는 김시종 시인의 원맨쇼였고, 추모비 장소제공은 영순면 부면장 고동훈 수필가가 문경군청에 적극 협조를 구했음을 밝혀둔다.
문경시 공군전우회의 김세광 상사 추모비 참배에 청순한 감동을 느낀다. 뒤늦게 나마 김세광 상사 추모비가 각광을 받는 것은, ‘의인(義人)의 부활(復活)’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