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의 미래학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공상과학소설(SF) 영화 관람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다. SF영화가 상업성만을 추구하다 보니 영화에서 그려내는 미래가 대부분 자극적인 디스토피아여서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은 속절없이 당하다가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줄거리는 미래를 매우 공포스러운 시공간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해 반(反)미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좋아하는 영화관에 못 가고 주로 집에만 있어야 하는 요즘, 나는 시간을 보내는 적당한 방법으로 온라인 영화 시청을 택했다. 미국의 주문형 콘텐츠기업인 넷플릭스에 가입해 영화 목록을 쓰윽 훑어보는데 ‘블랙미러(Black Mirror)’라는 드라마 시리즈가 눈에 띄었다. 장르를 보니 SF. 지인 몇 사람이 이 시리즈를 추천한 기억이 났고 나는 약간 주저하면서도(선생님의 SF 관람 금지령이 떠올라서) 블랙미러 첫 편의 시작 단추를 꾹 눌렀다.
그렇게 블랙미러로 빨려 들어간 나는 요즘 퇴근하면 이 시리즈를 본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못 본 것을 내리 시청하지는 않고 꼭 한 편씩만 시청한다. 결론이 대부분 어둡고 슬퍼서 저녁 10시 이전에는 시청을 끝내야 잠자리에 들 수 있고 한 편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힘들다.
대놓고 상업적 SF영화를 광고하고 싶지 않지만 이 시리즈의 제작자와 작가는 대단하다. 압축적 절제미, 스타일리쉬한 전개, 빈틈없는 줄거리, 가볍게 툭 던져진 대사에서도 철학적 깊이가 느껴진다. 이미 2011년 영국에서 첫 방영될 때부터 화제였다고 하니 나는 늦어도 너무 늦은 팬이 됐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재미있으면 됐지.
블랙미러를 계속 볼 계획이지만 예전 SF금지령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시리즈의 제작자 겸 작가도 밝혔듯 블랙미러는 미래의 기술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풍자한 드라마다.
블랙미러가 무슨 뜻인지 살펴보니, TV나 휴대폰이 꺼지고 난 뒤의 까만 화면이라고 한다. 이 화면은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온 내용은 나와 내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다.
평범한 나도 그 드라마적 상황에 놓이면 기이하고 흉측하고 음흉하고 애처롭고 엉뚱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블랙미러라는 이름에 담긴 뜻으로 해석된다.
블랙미러는 기술공포, 더 넓게는 미래공포를 부추긴다. 드라마가 설정한 미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은 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된다. 빠져나오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 그 자체가 공포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 미래의 작동 방식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생기고,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술은 매우 발전한 미래에 왜 인간은 한치의 발전도 없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까. 드라마에서 보이는 기술은 먼 미래인데 그 미래를 살고 있는 인간은 지금의 나, 또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미래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기술을 대하는 태도나 인식은 2020년 현재에 머물러 있다.
예를 들면 블랙미러 시리즈 중 한 편에서 인류는 자신의 의식을 복제해 가상세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든다. 제2의, 제3의 내가 사이버 세계에서 복제되는 것이다. 창조된 인물은 생각도 나답게, 행동도 나답게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 기술을 활용해 그동안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의 유전자 정보를 빼내어 가상세계에 이들을 복제한다. 그리고 이들을 부당하게 지배한다. 복제된 사람들은 착취당하고 괴로워하지만 이 세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
또 다른 시리즈에서는 모든 시민이 소셜미디어에 과몰입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 돼 있는 미래가 등장한다. 소셜미디어 기업은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개인들의 신상을 모조리 알고 있다. 이 미래에서는 경찰도,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이 소셜미디어 기업만큼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이 기업에게 정보를 구걸한다.
개인의 휴대폰 위치정보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며 해킹으로 그 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엿듣는다. 도대체 못 하는 것이 없다.
블랙미러가 조장하는 미래공포의 기반은 사실 진부하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수용성의 격차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불안, 소외, 공포를 ‘미래쇼크’로 진단한 바 있다.
이렇듯 기술과 사회의 탈동조화 현상을 막으려면 기술을 이해하는 시민들이 많아야 하고 기술의 미래를 예측해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는 전문가와 정책가들이 많아야 한다. 인류는 산업화 이후, 기술의 미래영향평가, 급진적 기술의 모라토리움(일시적 개발 금지) 선언, 기술의 윤리적 선용을 위한 노력, 사회문제 해결형 기술개발 등의 노력을 통해 미래쇼크를 막으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인간도 기술과 함께 진화하고 발전한다. 기술은 22세기인데 인간은 21세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SF영화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나만 시대에 뒤처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서 기인한다. 물론 불안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때 사회적 대안이 마련되는 속도가 빨라질 수는 있겠지만 대안 없이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불안이 팽배한 시대에는 그만큼의 희망과 대안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