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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폭군 연산군과 현주 광해군

안진우 기자 입력 2020.08.04 18:41 수정 2020.08.04 18:41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조선시대 27위(位)의 임금중 시호에 군(君)자가 붙는 임금은 제10대 연산군과 제15대 광해군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때에 재위중(在位中) 반정(反正)이 일어나 도중하차(下車)한 불운한 임금이다.
제10대 연산군과 제15대 광해군은 두 임금 다 어린 시절에 생모(生母)와 사별을 하고 의붓 어머니로부터 양육을 받아, 진정한 모정을 받지 못한 불운한 면도 있다.
연산군은 성질이 사납고 충동적인 면이 강하지만, 광해군은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성격이 밝고, 착하고, 공부(학문)에 정성을 다하여 미래의 임금으로 자질을 착실하게 쌓았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여색을 좋아했고, 부인(비·빈)도 12명이나 두었고, 자녀도 16남 12녀로 28명이나 되었다.
성종의 연산군 생모 폐출로 문제아 연산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은 생모 공빈 김씨가 아기 때 돌아가셨지만, 다른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도 성질이 영민하여 조금도 말썽 없이 어려서부터 공부(학문)에 열중하여 심성이 바르고 영특하여, 장래 제왕의 재목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국정에 전념했으나 학문을 싫어 하고 간신배(임사홍·유자광 등)를 가까이 하여 재위 10년동안 정변인 사화(士禍)를 두차례나 일으키고, 무오사화(1498년)·갑자사화(1504년)를 일으켜서 신진사류들을 물고를 냈다.
간신 임사홍의 권유로 채홍사·채청사를 온나라에 파견하여, 미모의 여인이면 미혼·기혼을 가리지 않고, 섹스서비스를 하게 했고, 유생들의 최고학부 성균관을 기방으로 만들고, 불교전당 원각사도 기루로 만들어, 불경 대신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궁궐에 까지 들렸다.
연산군은 사냥터를 넓히기 위해 백성들의 집을 헐고, 사냥터를 밟고 가는 백성들은 사정없이 참수를 하여, 왕의 취미생활을 위해 백성의 삶의 터전을 짓밟았다.
연산군의 흥청망청한 호색행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빈핍해 지고, 연산군의 여성편력은 백모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까지 범간하여, 백모 박씨가 자결까지 하게 됐다.
연산군은 박원종·성희안 대감의 거사로 왕위에서 폐위가 되어, 강화 교동현에 유배된지 채 한달도 못채우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4년 연상의 창기출신 장록수는 당일 거리에서 참살되어, 시신에 불을 질렀다.
반정(反正)으로 도중하차했지만, 광해군(光海君)은 참으로 아까운 왕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분조(分朝)를 이끌고 의병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정진하여, 의병들이 도처에서 승전보를 알려 왔다.
광해군은 서자로서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영의정이던 유영경이 광해군을 왕에 책봉한다는 어명을 두 번이나 감추고 속였지만, 결국은 속임수가 탄로나 역적으로 처형이 됐다.
광해군은 재위 16년 동안, 국방강화·농지확장·세제개혁(대동법 시행)·동의보감 편찬 보급·조,일국교재개(정상화)·실리외교(중립외교)로 명철보신하여 국가안보를 잘 지켜냈지만 실세한 서인들은 중립외교를 명에 대한 배신이라 하여, 능양군(인조)·김류·이귀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은 즉위 16년만에 폐위되어, 유배되고, 나중에는 제주도로 옮겨져서 쓰라린 귀양살이를 18년이나 했지만, 폐위 한달도 안되어 사망한 연산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후회않고, 당당하게 생을 영위했다.
인조반정의 악영향은 두차례의 호란(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의 큰 국난을 당해야 했다.
광해군의 폐출은 조선 역사상 최대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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