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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천국과 지옥의 풍속도

안진우 기자 입력 2020.07.20 19:00 수정 2020.07.20 19:00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연유는, 예수를 찾아 온 젊은 부자가 자기의 자선을 과시하고 예수의 칭찬을 받으러 왔지만 칭찬은커녕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그대는 나를 따르라”고 권유하자, 재산을 포기하기 싫은 부자청년은 예수를 떠나 갔다. 그때 예수가 한 말이, 서두(序頭)에 적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다.
옛날 예수가 살던 시절,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성(城)엔 바늘구멍 문(針孔門)이 있었다고 한다. 몸집이 큰 낙타가 통과하기엔 문이 좁았지만 낙타도 몸을 굽히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부자는 아예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게 아니라, 탐욕을 버리고 조금만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면 부자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의 존부는 죽어본 적이 없는 산 사람으로선 확신을 갖기가 조금은 어려울 것이다. 천국의 있고 없음을 두고 마음 쓸 일은 없다고 본다. 천국이 있으면 가고, 만약 천국이 없으면 안가면 그만이다. 천국은 포기도 기대도 금물이다.
이 세상에 살 동안 최선을 다해 살면 여한이 있을 수 없다. 사실 ‘사후천국’보다 살아생전 ‘지상천국’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양 격언대로 ‘숲 속의 열 마리 새보다, 내 손안의 한 마리 새가 더 소중하다’
기독교에 심취한 어느 크리스천이 ‘천국’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늘 염원하고 천국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드디어 크리스천은 기적적으로 꿈에 천국을 보게 됐다. 신은 크리스천에게 지옥풍경부터 공개했다. 방으로 된 지옥은 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살 한점 붙지 않은 앙상한 해골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팔을 굽힐 수 없는 곰배팔이라, 식탁에 가득한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팔이 굽혀지지 않아 먹을 수 없으니, 생전의 악한 성질이 더 모질어 지고 이 갈고 욕설을 퍼 붓고 그야말로 살벌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지옥맨들은 이타심이라고는 약에 쓸려고 해도 없었다.
지옥방문을 나서니 바로 옆이 천국방이었다. 천국방도 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해골들이 앉아 있었다. 천국방의 해골들도 팔이 굽혀지지 않아 자기 입에 음식을 가져갈 수는 없었지만, 나보다 이웃을 배려하는 이타심으로 무장된 천국시민이라 곰배팔이로 음식을 집어 마주보는 사람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마주보는 사람끼리 서로 먹여주니 양껏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어 해골들이 화색이 도는 것이었다.
꿈을 깬 크리스천은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가 지옥이요, 이웃의 입장을 헤아려 주고 배려하는 사회가 바로 천국인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은 이타심은 약에 쓸려고 해도 없고, 극도의 이기심의 소용돌이 복판에 놓여 있다.
천국이 있고 없고는 하등 문제될게 없지만, 사후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 격이라 어떤 대형사고도 일으킬 수 있다. 사후천국을 주장한 예수는 종교적 천재다. 인간의 악행과 범죄가 줄어든 것은 천국효과가 사람 심리에 큰 연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부자들이여 기죽지 마라. 조금만 더 몸을 굽히면 천국은 그대의 것이다. 폐일언하면 사람들의 지나친 천국 동경은 그 만큼 세상살이가 험하다는 반증이다.
천국을 부정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못할 악행이 없다. 천국이 없다는 극단론자는 무정부주의자와도 일맥상통하는 형제간이 아닐까. 부자를 미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자.
진짜 부자는 가멸한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밝고 맑은 마음을 가슴에 넉넉하게 지닌 사람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부자도 때가 차면 죽고, 한 끼에 밥 두 그릇을 먹고 살지 않는다. 부자도 한계상황을 못 벗어나는 다 같은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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