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자의 재미난 책, 문제의 책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생을 내어주고 얻은 듯한 예술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고흐나 슈베르트, 에밀리 디킨슨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빛이 아니라 어둠을 향해 가는 듯한 작가들, 제단에 양을 바치듯 예술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순교자’같은 이들을 통해서 이런 작품은 나온다. 이 예술가들이 파탄으로 끝나거나 고독한 인생을 살도록 자신의 생을 의도적으로 설계했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불행이여, 나를 마음껏 파괴하라’는 식의 인생의 행복보다는 예술을 택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미필적 고의'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내 문학계에서도 인생과 맞바꿔 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있다. 최승자(64) 시인이 그 중 한 사람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최승자 시인을 두고 이름만 보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가라고 했다. 그의 시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필름처럼 그대로 찍혀 있다. 고대 독문과를 다니던 중 갑작스런 학칙변경으로 제적을 당하고 출판사에 취직해 번역과 편집 등의 일을 했던 그는 1979년 계간지인 '문학과지성'에 투고하며 시인이 됐다. 그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등단한 김정환 이성복 황지우 김혜순 등의 쟁쟁한 시인들 사이에서도 ‘자기 내장을 다 드러내는 사람 이 던지 는 비수처럼 선연한 말’로 그 존재감을 한 껏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병과 생활고로 순탄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대산문학상을 받은 최승자 시인을 만난 황현산은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최승자의 가냘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인다. 젊은 시절 독기와 위악에 차서 자신을 잉여물로, 배설물로 규정하며 시를 썼던 최승자는 최근 출간된 신작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에서는 죽음을, 죽음 너머의 허무를 노래한다. 생의 욕심과 독기, 저항이 사라진 시인과, 모든 것을 토해낸 후 나오는 말간 위액같은 그의 시들은 속수무책의 슬픔을 안긴다. 권여선(51)도 자신을 내던지며 작품을 쓰는 작가인데 결은 최승자와 좀 다르다. 최승자가 좀 더 극단적인 불행과 파탄의 작가라면, 권여선은 아직 희망의 언어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허세도 엄살도 없는 도수 100%의 증류주 같은 작품들은 써낸다. 최근 출간된 작품집 ‘안녕 주정뱅이’(창비)에 묶인 단편들은 불순물 섞인 생을 가열해 얻은 한 방울 한 방울의 증류주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30년 넘는 음주 이력을 거치면서 온갖 우려와 질타, 냉담과 무시, 위협과 압박을 받아왔다’고 썼다. '생존증명서'처럼 하루 하루 시를 쓰는 최승자, 먼저 일어나지 못하는 술자리같은 소설쓰기를 묵묵히 하고 있는 권여선의 작품에서는 그런 이유로 숙연함이 느껴진다. 이들의 작품에서 슬픔과 공감, 연민 같은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것은 우리의 불행을 대신 짊어지고 사는 이들의 독주같은 삶 때문일 것이다.